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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 시인 / 화양동
입술 위쪽으로 솟아오른. 손가락으로 누르면 만져지는. 혀를 이와 살가죽 사이 로 밀어 넣어 봉긋하게 만들면 보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만져보고 느껴보고 살피느라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더는 안 되겠어.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서 면봉 두 개로 짜내면 영원할 것처럼 길고 가늘게 새어 나오는 길이 있다. 너도 올래? 모여서 떠드는 애들 옆을 지나다가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가게 된. 짧은 반바지 입고 물속에도 들어가고 서로의 얼굴에 물을 뿌리면 너 가만 안 둔다 맘 놓고 협박도 해보며 여름 야채 썰어 넣은 찌개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는. 냄비와 튜브 들고 걷는다. 높이 뜬 해가 점점 더 높아지면서 늘어질 대로 늘어진 아스팔트길. 저만큼 앞에 그때는 알았지만 지금은 기억 안 나는 애가 있다. 그 애도 걸려 넘어진 걸까. 열심히 걷고 있지만 언제 도착할지 몰라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임승유 시인 / 날씨
그는 주말 아침 밖으로 나갔다. 우유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보리쌀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가는 김에 저 옷들도 가져다가 맡기는 게 좋겠어요. 큼직한 가방에 옷가지를 담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주말 아침 밖으로 나갔다.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씩 내리는 비는 주말 아침 밖으로 나가는 일과 잘 맞아떨어졌다. 스웨터를 여미며 그녀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문을 안 열었으면 어떻게 하지. 이른 주말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주말 아침 밖으로 나갔다. 큼직한 가방을 들고 나갔다.
-웹진 『님Nim』 2023년 4월호
임승유 시인 /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 놓은 것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 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임승유 시인 / 부끄러움
수족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수족관 앞에서 기다려보고 싶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수족관 앞에서 만나면 콜라를 한 캔씩 사서 마시고 마주보며 웃다가 수족관은 이런 곳이구나 백 센티미터가 넘는 은갈치가 전시되어 있으면 백 번도 넘게 수족관에 다녀본 사람처럼 수족관을 돌아다녔겠지만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수족관 앞에서 기다려보고 싶다던 사람 말이에요 내가 일요일에 수족관에 나타나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잖아요 그래서 일요일만 되면 수족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수족관 앞에서 기다리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갔답니다 백 번도 넘게 일요일에 말이에요
임승유 시인 / 여성시 읽기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 찾아 온 늙은 여자
둘이 뭐하는지 다 봤어.
나갔다 들어왔을 때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놀려댔지. 응? 이런 거? 나는 그녀를 한 번 더 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여러분도 아셔야 할 텐데!
아셔야 할 텐데… 우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짠… 짠…웃고 떠들어서 배가 아프다. 입이 아프다. 입이 아픈데 재미있어도 될까. 다음에 또 만나도 될까.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담배 피우려는 사람들이 나가고
솨아 솨아 빗소리가 들린 것도 아닌데 비 냄새를 몰고 그게 왔다. 엄마는 그게 그건 줄 어떻게 알았어?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고 나는 엄마의 엄마라고 부르다가 끝을 몰라서 끝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한 번 더 만지고 싶어 쳐다본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구불거리는 능선을 타고 솨아 솨아 비바람을 몰고 오면서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고 슬픔에 빠뜨렸다가 끄집어내기도 하며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해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급기야 기다림이 뭔지 알아버리는 저녁처럼
비 오기 전에 서두르느라 푸릇한 게 뒤섞인 비료 푸대를 짊어지고 도착한
달면서도 시고 시면서도 단 지나온 날들과 남은 날들을 다 합친 것처럼
늙은 여자. 보여줘! 보여줘! 한 사람이 추기 시작해 다 같이 일어나 추는 춤처럼
임승유 시인 / 휴일
휴일은 오고 있었다. 휴일이 오는 동안 너는 오고 있지 않았다. 네가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는 채로 오고 있는 휴일과 오고 있지 않는 너 사이로
풀이 자랐다. 풀이 자라는 걸 알려면 풀을 안 보면 된다. 다음 날엔 바람이 불었다. 풀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내가 알게 된 것을
모르지 않는 네가
왔다가 갔다는 걸 이해하기 위해 태양은 구름 사링로 숨지 않았고 더운 날이 계속되었다. 휴일이 오는 동안
임승유 시인 / 점심시간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
무슨 일 없었어요?
질문하면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보냐 따지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들이 학교 담장을 타고 넘어가 인근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가서 담배를 피웠고 주민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각 반 아이들 이름이 호명되는 사이에
나갔다가 지금 막 들어온 사람은 담을 넘어 본다. 가급적 주민 입장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함께 담장을 타 고 넘어간다. 혼자서는 못 넘는 담을 수월하게 넘는다. 멀리 볼 필요 없지. 어서 와, 내밀어주는 손을 잡으며 눈에 띄는 현관으로 들어간다. 옥상까지 올라간다. 여기부터는 조금 어렵다. 언제 한번이라도 아파트 옥상 에 올라가 봤어야지. 이 부분은 안 건드리는 게 좋겠다.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심정으로
주변의 눈을 피해 따라가 본다. 혼자 갔다면 웅크렸을 텐데. 잘 안 보였을 텐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르르 몰려갔지. 일이 커져 버렸지. 저렇게 커져 버린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모여서 수군거리고 쯧쯧쯧 혀를 차면서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저만치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아이
그 아이와 가깝다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슨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가까이 가보면 새우깡을 먹고 있는. 양파링도 나쁘지 않지. 어쨌거나 가운데 커다란 구멍을 남겨놓고 가장자리를 돌면서.
점심시간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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