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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애 시인 / 사라진 연못
서어나무, 못 안으로 지고 있다. 검버섯 핀 얼굴로 체머리 흔들고 있다. 청보리 굽이치는 들길 지나 할머니 시집오던 해 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는 서어나무 못처럼 깊은 가을밤 건너고 있다. 잎 진 가지마다 별이 돋는다. 서어나무 시린 밑둥에 아직도 기대고 서 있는 지게 바지게 나뭇잎처럼 가벼워진 할머니 거기 올라 앉아 물으신다. 아가! 연못이 없어졌다. 연못 못 봤니! 나뭇잎 이불에 덮여 사라진 연못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쪽으로 좀더 가까워지고 있다. 치매는 그리움의 뒷면이 아니면 신념인가 보다. 서어나무 뚝뚝 뼈마디를 꺾고 있다. 못 안에 빠진 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지난 세월 엿듣고 있다.
-2007년 <불교문예> 하반기 신인상 중에서
이선애 시인 / 꽃소리
득음정 홍매화가 목젖을 열 때쯤 나는 행선지를 허공에 띄우고 안절부절을 시작한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는 가녀린 비명
나이테가 몸에서 먼 가지일수록 위태로워 눈부신 소리를 낸다
어느 땐 부채로 얼굴을 가린 가객이 버선발로 뽑는 소리처럼 대청이 술렁이고 귀명창 나비들 감전된 듯 제 가슴을 꼴깍꼴깍 삼키는 소리
언제부턴가
내가 키우는 화분도 변성이 오는지 파대와 유파가 다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무딘 가슴속 통로를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 내 몸속에 잠든 지루한 계절을 깨우고
기척 없는 물과 불의 절정에서 들린다, 조용히 꽃대 밀어 올리는 소리
이선애 시인 / 연도교를 건너는 밤
새들이 시간과 섬을 연결합니다 발자국 화석을 간직한 섬을 먹여 살리는 건 새들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차량이 물 흐르는 곳 새로 개통한 연도교가 있습니다 팽팽히 시위를 당긴 주탑 아래서 한 팔이 없는 썸낭이 손을 흔들고 절단 부위가 저릿하게 건너오는 환상통 물빛 블라우스를 입었습니다 새들의 시간과 섬의 시간이 발자국 위에서 겹칩니다 배를 잃고 가족을 잃고 이름을 잃어버린 섬들이 늘고 대신 울어주는 내 눈물의 양식도 늘었습니다 수억 광년을 달려오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온 별빛들 사도 추도 낭도 목도 적금도 바다에 뜨는 별자리 이름입니다 연도교를 건너며 기꺼이 섬의 팔이 되어준 이름 모를 새들이 고맙습니다 접히지 않아서 모자란 하루를 또 바다로 띄우겠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선애 시인 / 야합
찻잎을 따면 손끝에 개구리울음이 있다 자왈자왈 자왈자왈 야합이 없다면 공자도 없고 나의 경전인 禮, 樂도 없다 무대에 선 어릿광대처럼 자왈자왈 자왈자왈 차꽃은 꽃피우기 좋은 봄을 버리고 늦가을 서리를 맞으며 핀다 꽃이 피는 것은 봄이라서가 아니다 바람과 태양의 조건도 아닌 울음에 대한 몰입 때문이다 단단한 씨앗을 감춘 채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소리 다 버리고 토씨와 야합하고 싶다
-시집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2020. 상상인
이선애 시인 / 물의 “시”
그의 걸음은 느리면서 빠르다 이마에 피를 묻히고 하천과 굴강 밑바닥 구르는 튤립나무 노란 꽃씨를 찾아 헤맨다 꿈을 꾸기 좋은 곳 새와 사람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 탄탄한 뼈대 세우고 꽥꽥 썼다가 지우는 완성과 반성 천 길 물속에서 천개의 바람 거느리는 오리발 매번 일이 틀어지고 갖고 싶은 것은 죄다 부서진다 세상의 주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개체 수 가장 많은 식물이다 꼬리에 꼬리 물고 앞으로 나간 만큼 되돌아오는 길 인공 호수와 푸른 산봉우리가 꺼졌다가 솟아오른다 순천만 호수정원 물가에 떠오른 “시” 후레쉬가 터지고 나누어져 시인도 되고 시민도 되는 사람들 시간은 가혹해 과거는 보이지 않고 현실은 발아래서 삐거덕 거린다 시인에게 행복한 운명이란 있을 수 없지 흰자위가 밀리고 동공이 긴장한다 발자국이 말하는 눈의 알리바이 “시”의 첫 글자 걸어 나온다
*“” 환경운동가이며 설치미술가 최병수의 작품.
이선애 시인 / 토막토막 텅텅
하얀 플라스틱 도마 위 피망꽃이 핀다 칼 지나간 자국 따라 하양 초록 빨강 피들이 튄다 이방의 눈빛들 날아와 박히는 동안 나는 도마 위에서 다져진다 서툰 발음 내뱉는 말들 혀끝을 물들인다 텅텅 도마가 운다 칼이 노래를 삼킨다 볕 좋은 날 베란다의 햇살이 칼자국을 붙잡는다 나는 이제 이방의 말에 더 이상 상처 입지 않는다
-시집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에서
이선애 시인 / 말이 모는 남자
말이 눈 뜨네 검은 갈기 감은 듯 눈 뜨네 달리는데 발자국이 찍히지 않네 손짓을 다해 부르는데 손이 보이지 않네 그날 밤 남자는 말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 달릴수록 고도에 도달할 수 없네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남자 두리번거리며 말의 고삐를 잡고 가네 팔다리를 흘려버린 불온한 사랑 끝없이 착종되는 검은 그림자와 눈사람 을,를,을,를 말을 모는 남자 바깥에서 말의 눈이 닫히네
-시집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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