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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9.
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사람들 저마다 창틀 속으로 들어가 고요한 밤

몇 점 반딧불로 떠돌던 야경꾼 호루라기소리마저 철수한 도시

우우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창틀 속 아늑한 평화를 위해 골목길에 버린 귀엣말

삭제한 발언 꿀걱 마셔 버린 분노 스스로 헌납한 시민권

고요함의 이름 아래 육신을 잃고 제명처분당한 영혼들

 

 


 

 

이윤택 시인 / 늑대

 

 

빈들 마구 달렸어

갯바닥 풀섭 꾀꼬리알 훔치고

낮게 나는 새 모조리 잡아 먹었어

표범과 만나 돌밭 당당히 뒹굴었고

없는가

숲이 썩고 있어

부러진 상수리 옆구리 불 새고 있어

보이지 않아

도사리고 앉은 나무들 웅웅 매맞는 소리

어디 있는가?

생솔가지 불타는 밤

황홀하게 쓰러지는 휘파람 소리

밤에 핀 포도알 알알이 삼키며

눈부신 아랫도리 벗어 던졌어

 

 


 

 

이윤택 시인 / 춤꾼이야기

 

 

슬픈 노래가 너를 천국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슬픈 노래 흐를 때 슬픈 노래 지그시 밟고 빙글 멋지게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이 세상과 우리 사이 발이 있다

하나님은 발이 없지

막달레나 마리아도 내 발을 닦아 주었다

미스터 J 춤을 추세요

당신의 발 너무 날렵해 날아다니는 것 같애

나는 날지 않았다

스텝을 밟으며 욕심 없이 발자국 지우며

슬픈 노래 가득 찬 세상 손을 내밀었지

한 번 추실까요, 아가씨?

 

 


 

 

이윤택 시인 / 사람냄새

 

 

어느날 문득 내 몸 속의 피 우 들끓어오르며

눈두덩이며 사타구니며 툭 투욱 두드러기로 솟구칠 때

나는 신분증명서를 반납하고 시간표 밖으로 걸어나왔다

썰렁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외롭다

 

 


 

 

이윤택 시인 / 포스트 모던한 저녁 뉴스 한 토막

 

 

밥숟갈을 들면서

 

습관적으로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데

 

난데없이 연극배우 기주봉이 화면 속에 나타나

원망스럽게 날 쳐다본다

 

대마초를 피우다가 쇠고랑을 찼다는데

 

다른 연예인처럼 얼굴을 가리지 않고

 

형사계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지도 않고

 

MBC-TV 공영 카메라를 삐딱하게 받고 서서

 

불편한 심통으로 날 쳐다본다

 

내가 세상에 기대한 것이 없는데

 

왜 날 가두는 거냐

 

뭐 이런 눈길로 세상을 노려보는데

 

나는 그만 밥 먹다 말고

 

지금 절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선 슬픈 광대

 

살아 있는 연기를 본다

 

 


 

 

이윤택 시인 / 참나무

 

 

참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래 내가 물었다

참나무야,

너는 어떻게 늙어 가니?

 

가능한 시선을 멀리 두고 살지

그러면 아직 나를 중심으로

별들은 순행하고

 

하루 쯤 늦은 신문이라도 받아 볼 수 있겠지

 

좀 외진 곳에 살더라도

그늘을 넓게 확보 하는 게 좋아

지금 세상은 빛을 너무 받아 지랄발광하지

깊게 패이고 썩은 몸에서 맛 나는 버섯이 자라고

딱정벌레 같은 가족은

내 몸에서 흐르는 진땀을 먹고 산다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담는 그릇

언젠가 허옇게 마른버짐 피우며 부러지겠지

그때는 군불 떼는 땔감

그때가 사실 내 삶의 철정이지

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면

탁, 틱, 툭 짧은 외마디 비명

그대로 숯이 되겠지

숯에 스며든 격문 같은 시 전사 같은 삶

그대로 천년 쯤 시간을 견디며

사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윤택 시인 / 맑은 음(音)에 대한 기억

 

 

내가 휘파람을 배운 건 일곱 살 때다

여름이었다.

맑은 음이었다.

나는 휘파람으로 이 세상을 유혹하고 싶었다.

역시 일곱 살인 내 사랑... 천변 건너 그 여식애의 집

...그 주변 다리 밑 동천강

동천강의 피라미떼

내 맑은 음이 닿는 세상은 둥글고 따뜻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논리를 익히고 기하학을 배우면서

내 사랑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휘파람을 잃었고

우린 심심찮게 말다툼을 했고

그때부터 세상은 내 삼각자 밑에 놓인 도면이었다.

그때부터 난

염증을 앓기 시작했다.

 

 


 

이윤택 시인

1952년 부산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졸업. 1979년 《현대시학》에 〈천체수업〉 등의 시로 추천되어 등단. 시집 『시민』 『춤꾼 이야기』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밥의 사랑』 등과 평론집 『우리 시대의 동인지 문학』, 『해체, 실천, 그 이후』 등. '열린시' 동인이며 연극집단 '거리패'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