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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인 / 뒷모습의 시
나는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고 너는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지나갔다 언덕이 각도를 세워 기울고 있었다 아니, 언덕이 길어지며 다시 눕고 있었다 몇걸음 가다가 뒤돌아보았다 너는 등을 보이며 계속 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나가던 너처럼 정말 우리는전혀 모르는 사이 같았다 -시집 <빛그물> (2020)
최정례 시인 / 모란의 얼굴
젊고 예쁜 얼굴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빨간 꽃잎 뒤에 원숭이 얼굴을 감추고
일요일 아침 모두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가자! 결의하고는 떠나고 있다
맹인의 지팡이 더듬어 잡고
최정례 시인 /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지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를 행성 그 머나먼 불빛
최정례 시인 / 하산
그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검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짓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 개울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들고
숲에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최정례 시인 /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한 다알리아에 주먹만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 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불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불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불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 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
최정례 시인 / 한짝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용산역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느라 장갑을 벗었었다. 커피를 주문하느라 카드를 꺼냈었다. 개찰구로 나가기 전 십오분간 서성이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장갑이 한 짝뿐이라는 걸 알았다.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가방과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눈앞에서 간판들, 창문들, 지붕들, 헐벗은 가로수들이 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또 사면 돼, 무심해지려고 애썼다. 역 구내를 흘러 다닐 커피 냄새, 오가는 사람들, 역사 밖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날씨가 차가웠다. 장갑은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이다. 손목 끝에 밍크털 장식이 붙어 있었다. 밍크털이 아니라 펭귄털인지도 모른다. 손목 부분을 바닥으로 세워놓으면 뒤뚱거리다 쓰러졌다. 전날 밤 TV에서 본 펭귄 같았다. 펭귄이라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펭귄은 남극에 산다. 얼음 위에 서서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고 하체의 체온으로 알을 덥힌다. 얼음 바다를 마주 바라보며 먹을 것을 구해 돌아올 짝을 기다린다. 멀리서 뒤뚱뒤뚱, 날개였던 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짝을, 목구멍에서 먹이를 토해 부화한 새끼의 입속에 넣어 줄 짝을 기다린다. 얼음 설원에 눈보라가 친다. 장갑은 한짝뿐이라 누가 주웠다 해도 다시 버려질 것이다. 구석에서 더 구석으로 치워질 것이다. 장갑은 신경도 뇌도 없으니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쓰레기통에서 커피 찌꺼기, 쭈그러진 종이컵, 비닐봉지와 섞인다 해도 기분 같은 것은 없다. 차갑고 더러운 곳으로 휩쓸려 간다 해도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바다로 간 펭귄도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바닷물 위로 붉은 피가 피어올랐는데,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바다사자들은 언제든 펭귄을 공격하니까. 부화하려던 새끼는 얼어버린 돌덩이가 되어 나뒹군다. 한 짝은 얼음 바다를 계속 바라보고 서 있다. 한 짝은 느낌도 생각도 대책도 없다. 또 사면 돼, 그 생각에만 매달렸다.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에서
최정례 시인 / 한줄기 넝쿨이
어항 속의 물고기를 사람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물고기가 사람의 실내를 들여다본다고 할 수는 없다
창을 기어오르다 디딜 곳을 놓친 담쟁이넝쿨 한 줄기가 창가에 걸쳐 있다 실내를 들여다본다? 아니다
나는 콩을 까고 있다. 껍질은 왼쪽에 놓여지고 콩은 오른손에 잠깐 들려 있는가 싶더니 바구니에 담긴다
손이 콩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콩에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들여다보는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들여다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콩이 튀어 식탁 밑으로 달아나고 한 줄기 넝쿨은 거꾸로 매달린 물음표 모양으로 실내를 들어 올리며
이게 다 뭐냐? 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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