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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우 시인 / 팔리지 않는 추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9.
이진우 시인 / 팔리지 않는 추억

이진우 시인 / 팔리지 않는 추억

 

 

추억은 자꾸만 흘러나온다

귀에서 뚫어진 바지 주머니까지

구멍이란 구멍으로

 

참으로 잊은 지 오래인 추억이 빠져 나올 때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비듬처럼 우수수 떨어지며

어깨를 툭치는 그것

 

거리에 나서면

발목까지 추억에 잠긴다

걸음이 무겁다

발끝으로 힘겹게 그려보는 하루

 

추억의 다리는 길어 더디다

추억을 따라 걷다보면

시간은 일제히 멈추어 선다

빨간 신호등 밑에 선 채

내 몸은 굳어간다

 

바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추억의 좌판을 벌인다

무수히 눈에 걷어채이는 정강이들

눈높이의 세상은 퍼렇게 멍이 든다

좌판 주위로 또르르 굴러다니는 눈알들

오늘도 추억은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좌판을 걷을 수 없다

 

 


 

 

이진우 시인 / 가족 사진

 

 

둥지로 돌아가는 갈매기 울음 멀고

밤은 가깝다

석양이 붉은 수평선을 뒤로 하고 선 가족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가족 사진을 찍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하나가 없다

어디 먼 데를 간 것도 아니고

삐져서 오지 않은 것도 아닌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 사진이 커져만 가는 동안에도

늘 한 사람은 없다

사진을 찍어야 했던 그 누군가,

형이거나 나거나 동생이거나

돌아가면서 빠져야 했던 가족 사진

 

식구가 빠져 있는 가족 사진을

어머니는 벽에 걸지 않았다

 

언제 한번 우르르 사진관에 몰려가서

모두 함께 가족 사진을 찍는 게

아버지의 꿈

 

잘 찢어지지 않는 인연을 타고 난 사람들

그래서 가족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오늘,

 

석양이 붉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서서

가족 사진을 찍는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퇴색되지도 않게

눈으로 찍고 마음으로 찍는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찍는다

우리 가족 사진

 

 


 

 

이진우 시인 / 노자의 시창작 강의

 

 

 아름답다 말하는 시는 추하고

 한목소리로 좋다는 시는 나쁘다

 한눈에 읽히는 시는 믿을 수 없고

 믿으라는 시는 두 번 읽히지 않는다

 착하다고 시를 잘 쓰는 것이 아니고

 시를 잘 쓴다고 착하지 않다

 지혜롭다고 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시를 많이 안다고 지혜롭지 않다

 시를 아는 이는 시를 말하지 않고

 시를 말하는 이는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시를 쓸 때는 작은 생선 굽듯 조심하라

 힘주고 싶을수록 낮추거나 감추고

 뽐내고 싶을수록 뒤로 물러나며

 작고 하찮은 사물을 크게 보고

 적고 힘없는 사람을 높이 여기며

 어려운 표현은 쉬운 단어에서 찾고

 복잡한 상황은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며

 모두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모두가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사람들이 잊고 사는 진실을 드러내라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화려한 말솜씨는 더듬는 듯

 시는 나날이 덜어내는 것

 덜어내면 차고

 더하려면 오히려 모자라는 듯

 천하에 시보다 부드러운 것은 없으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기에 이만한 것이 없나니

 

 


 

 

이진우 시인 / 저구마을

 

 

거제도 굽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면

세상을 잊고 달리다 보면

긴 뱀이 섬으로 누워 있는 바다가 있다

 

주머니가 늘 비어 두 손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버스 정거장에서

바다가 가끔 펄떡인다

 

저구에 닿으면

바다가 먼저 안부를 묻는다

버려진 집들이 아는 체를 하고

아이들이 뒤를 쫓아 다닌다

 

바다를 목에 두르고

자갈로 머리를 장식한 해변에

세상의 모든 것이 쓸려와 마을을 이룬 해변에는

생각이 많은 바람과

쉬지 않고 물질하는 파도가 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면

바다에서 쏟아진 별이 하늘을 채운다

별을 보고 짖던 개가 제풀에 지치면

파도는 한껏 졸고

막걸리 양조장이 문을 닫으면

바람은 대숲에서 잠을 청한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꿈 몇이

바다에 일렁이는 달빛으로 배를 불리는 밤

저구의 밤은 깊다

 

 


 

 

이진우 시인 / 기상대에서 알리는 말씀

 

 

내일은 오늘과 다른 날이 될 것입니다

새벽부터 짙은 안개를 동반한 슬픔이 전국을 뒤덮게 되겠습니다

이 슬픔은 하루종일 영향을 미치겠습니다

동틀 무렵에는 슬픔 사이로 간혹 햇살을 동반한 기쁨도 보이겠습니다

그 기쁨은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을 동반하겠으나

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는 못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내일은 예년보다 슬픈 만큼 춥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슬픔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계속된 기쁜 날씨로

식상했던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전망됩니다

슬픔에 지친 분들은 외출을 삼가하시고

기쁨이 지겨운 분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해 뜨는 시각은 슬픔이 제풀에 잠깐 꺽일 때이며

해 지는 시각은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때입니다

모쪼록 별 탈 없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상대에서 알려드렸습니다

 

 


 

 

이진우 시인 / 하루

 

 

고맙게도 눈을 떴구나

하루를 더 살라는구나

오늘을 축하한다고 햇살은 황금빛이구나

숨을 쉬고 걸을 수 있으니

이 하루를 맘대로 돌아다녀도 되겠구나

어제 하루,

살아온 모든 날들

뭘 보았고 하였고 느꼈더라

하루를 더 살게 되면

뭘 하고 싶었더라

바쁘게 다니면 바쁘게 지나가고

느리게 다니면 느린 하루

어제와 내일을

새로 만드는 하루

일생보다 긴 하루

다시 오지 않을 이 하루가

세상 모두를 깨우는구나

 

 


 

 

이진우 시인 / 내가 정말 그녀를 만났던 것일까

 

 

나이든 하루살이가 날아다니네

휙휙 스쳐가네

낯익은 자리에 멈추네

그녀가 앉았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네

흘러 나를 지나치네

 

정말 내가 그녀를 만났던 것일까

 

길은 휘고 집은 멀어라

잊은 지 오래인 길을 걷는

낯선 얼굴

벌이 웅웅거리네

강물에 띄워 보낸 사진이 펄럭이며 날아가네

길은 끝이 나고

날은 저무네

눈 밟히는 소리 들리네

기억이 살아나는 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눈을 뜨고

어둠을 지켜보네

 

그녀가 자꾸 보이네

 

 


 

이진우 시인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내 마음의 오후』. 장편소설 『적들의 사회』 『소설 이상』 『메멘토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