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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석 시인 / 무위의 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9.
박해석 시인 / 무위의 시

박해석 시인 / 무위의 시

 

 

우두커니가 우두커니 먼산 바라보다가

오늘도 별 탈 없이 하루가 가는구나 하고

지친 다리 좀 쉴까, 고개 꺾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 고즈녁이가 고즈넉이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제 그림자인줄알고 손짓을 해도 꿈쩍도 않고

이봐, 너는 누군데 내 자리에 들어와 앉아 있지

그런 뜻의 눈짓을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고즈넉이가 고즈녁이 올려다보는눈빛에

우두커니는 또 우두커니가 될 수밖에요

 

세상에는 때로 이런 말없는 동무가 있어

살고 살아지는게 아니겠어요

 

 


 

 

박해석 시인 / 망극

 

 

말이 있어 하루가 열리고

물이 있어 하루가 흐르네

말길 물길 내기 위해

말을 넣고 물을 붓고

오늘을 여네 오늘이 열리네

말길 열어 너에게로 가고

물길 열려 나에게로 오네

말길 물길 어우러져

무등 태우고 곱사춤 추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한마디 말

흐르는 저 물 위에 놓을 제

어느 꽃잎인들 낮 붉히지 않으랴

때로 말길에 차여 시퍼러 멍이 들고

물길에 치여 오금이 서슬 퍼래도

굽이굽이 천길 벼랑 아래로

만 길 폭포로 쏟아져내려도

다시 만나 흐르지 않으랴

짝지어 뺨 부비며 흘러가지 않으랴

내일을 트기 위해 말길 다소곳해지고

내일 또 잇기 위해 물길 잦아드네

다 못다 한 말길 물길

꿈길에 길 내어주고

하루를 닫네 하루가 닫히네

 

 


 

 

박해석 시인 / 나는 끝끝내 미치도록 보고 싶다

 

 

이쪽에서 그쪽으로

이 방향에서 그 방향으로

여기에서 거기로

가는 걸 어디메쯤

서성이는 네가 나는 궁금했다

밤에서 밤으로

불꽃에서 불꽃으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바로 오늘에서 바로 내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네가 나는 못내 그리웠다

거기 닿기 전에 만나야 할

지나치지 않고 꼭 붙들고

말 물어봐야 할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네가

나는 끝끝내 미치도록 보고 싶다

 

 


 

 

박해석 시인 / 무야戊夜

 

 

입춘 전날

오래된 벗들과 함께

완화병동에 누워 있는 그대 보러 간 날

이미 시간의 끄트머리를 베고 있어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헤어질 때 술꾼답게

"가다가 술 한잔하고 가야지?"

이 말만은 빠뜨리지 않은 그대

그 말이 지상에서의 그대가 나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네

그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그대에게 만나 처음 던졌던 말을

"조형, 우리 술 한잔할까요?"

하늘이 뻥 뚫린 듯

폭설 쏟아지고 밤새 그치지 않고

그다음다음 날 그대 눈감았다고

그날 이후 자주 깨는 잠을 더 자주 깨고

오늘 또 어떻게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시간

눈떠 어둠 속에 일어나 앉아 있네

손꼽을 수 있는 촌수 그 수점점 줄어들고

그 곱던 사람 눈주름 얼마나 늘었을까

어처구니없는 세상사 얼마나 많았고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인간사 너무 적고

어떤 살붙이보다 살갑던 그대는 보이지 않고

이제 남은 건 텅 빈 손과 열없는 가슴뿐이라

갈데없는 웃풍에 비루한 몸뚱이 더 상할까봐

따듯하게 여며준 이불 한 자락 가만 쓸어보네

창밖에 컴컴하고 역린의 고추바람은

발굽 쳐 달려가는데

눈밭에 까마귀 서예하고 있다야

나도 주막에 가 막걸리 한잔 빨고 싶다야

그대 목소리 가평 골짜기 돌아오는데

백주대낮의 환한 메아리로

술잔 속 술처럼 남실남실 되돌아나오는데

언제 그 많은 날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고 있었는지

없는듯 있고 있는 듯 없던

어제는 그대 사십구재였는데

어떻게 어떻게도 할 수 없어

허공 위 어디쯤에서 웃고 있을 그대 찾아보려고

봄 없는 봄하늘만 눈이 시리도록 보고 왔는데

 

 


 

 

박해석 시인 / 봄밤에 짓다

 

 

가난을 표나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우리 가난홍보대사 홍보하고는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요

요즘엔 눈총도 손가락질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구구절절 피눈물 흘린 그대 가난

끊임없는 전란 군주의 어리석음 미색 양귀비의

요사스러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대 애옥살이 행적 손가락 짚어가며 좇아가는 밤

간언도 잘하지만 딸린 식구들 밥 굶기지 않으려고

쌀 좀 보내달라고 간청도 곧잘 해야 하는 그대

성도 밖 물가에 친척과 벗들의 도움으로

띠풀로 지붕 이어 지은 초가집이

지상의 유일한 안식처라 그리도 마음에 들어했는지요

지금은 웅장한 '두보초당(杜甫草堂)'이 되어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지요

삼협에 뜬 달이 물마루 가슴마루에 비쳐드는 외로운 심사

타향 떠나면 또 다른 타향 거기 어딘가에 굶어 죽은 아들 묻고

평생 먹물 노릇 후회는 하지 않았는지요

그대 시편 행간마다 피비린 북소리 울리고

쫓겨가는 백성들의 창백한 옷자락 나부끼고

잔나비 울음소리에 촛불마저 꺼지는 밤

내일이면 또 식솔들 굴비 두름 엮듯 한 줄로 세워

누런 하늘 아래를 걸었으니

그대 지고 이고 간 하늘은 오늘 여기도 매한가지

동서에 고금을 통해 글쟁이 호강한 적 없으나

이 나라 조정에서 글지이 딱한 사정을 어찌 헤아려

방방곡곡에 방을 내어 작품을 응모케 하여

낙점을 받으면 구휼미 스무 석씩 나눠준다기에

상갓집 개도 먹길 꺼린다는 국록에 눈이 멀어

우선 그거라도 받아 호구를 덜어볼 욕심에

때묻은 공책 침을 발라 넘겨가며 떨리는 손으로

무딘 붓 잡고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는 밤

그대같이 「빈교행(貧交行)」노래하던 가객도 사라지고

찬 서리 눈보라에 국화꽃 상찬하던 풍류도

기개도 눈 녹은 듯 보이지 않고

난삽과 교언영색의 말들만 무시로 춤추듯 어지럽고

가난은 사랑의 하인이라는 사랑스러운 금언도

더는 가슴에 와닿지 않고

직장도 없고 소중하던 사람은 가까운 듯 멀리 있고

처자식과 떨어져 노모와 밥 끓여 먹는 날들

요행히 글삯 몇 푼 생기면 서슴없이 서너 냥쯤 헐겠습니다

그대가 반색했다는 말젖과 포도로 빚은 유주는 구하기 힘 들더라도

여기 불소주 물소주 된 지 오래되어 제 맛을 잃었더라도

한산곡주와 이강주는 아직 불기운 살아 있어 마실 만하지요

그게 안 맞으시면 제가 한 때 즐겨 마셨던 이과두주나 고량주에

마파두부 안주삼아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제가 마시고 있는 막걸리를 맛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황하의 엽편주같이 떠돌던 그대의 파란만장이

천파만파 허연물보라로 일어났다 스러져가는

한강유람선 난간에 기대어 추억에 잠기는건 어떨는지요

우리 사는 속내 물고기 배래기처럼 확 뒤집어보는 건 또

어떨는지요

살벌한 북풍 휘몰아치는 상강

병든 몸으로 배에 누워 세상에 작별을 고한 그대

주검을 운구할 방법이 없어 마흔세 해가 넘어서야 겨우

고향으로 돌아간 그대

다시 한번 몸 일으켜 기러기 편에 일자서 띄우면

멀지 않은 평택 나루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버드나무 없어도 버드나무가지 잡고

버들잎 없어도 버들잎 한 잎 두 잎 씹으며

서늘한 가난 앞세우고 올 당신

꼭두새벽부터 기다려보겠습니다

 

 


 

 

박해석 시인 / 숨은 사랑

 

 

사무친 마음의 잔가지를 쳐내고 쳐내고

마지막 남은 한 가지를 굵은 삼베울로

칭칭 엮어 보냅니다

 

풀어서 당신의 나무에 접붙여 주십시오.

먼 훗날에 조용히 뜰에 나가보겠습니다.

덧나지 않은 푸른 잎사귀 하나 나부낀다면

당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박해석 시인 / 띄어쓰기에 맞게 쓴 시

 

 

서로가 이만큼씩 떨어져 살아

이 세상이라고 띄어 쓰는가

그런 것들이 비로소 한데 모여

저세상이라고 붙여 쓰는가

 

더는 춥지 말자고

더는 외롭지 말자고

더는 헤어지지 말자고

 

 


 

박해석 시인

전북 전주 출생. 1995년 《국민일보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견딜 수 없는 날들』 『하늘은 저쪽』 『중얼거리는 천사들』. 동시집 『동그라미는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