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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은기 시인 / 인드라의 그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9.
정은기 시인 / 인드라의 그물

정은기 시인 / 인드라의 그물

 

 

 지난 밤 잠자리가 불편하여 머리를 똑바로 누이지 못한 것이 혹시 내 뒤통수에 꽂혀 있는 플러그 때문은 아니었을까, 간혹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외국의 여배우들이 내 꿈을 다운로드 받아간다 가끔 내 것이 아닌 꿈을 꾸기도 하는데, 여행지에서 들렀던 오래된 성당 종탑의 꿈을 꾸거나 종탑을 찍던 니콘 FM2의 꿈을 대신 꾸기도 한다. 굳게 닫힌 성당

 

 그러나 감추려고 하는 것들도 나는 긍정하기로 했다 이제는 가출이 인정되는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향해 독설을 퍼붓지 못해 현기증만 첨탑 위에 걸어두었다 종이 울릴 때마다 발목이 휘청거려도 범람하는 세월은 용서해주지 않았다. 길 건너편으로

 

 조선시대의 정원이 있다 왕의 탯줄을 보관했다는 곳 탯줄을 잡고 들어가면 흐트러진 삶을 복원시킬 수 있을까 한번 연결되면 접속을 끊을 수 없는 인드라의 그물 속에서 내가 가끔 느끼는 외로움은 끝없이 골목을 파고드는 가로등으로부터 전송된 것인지 모르고, 나의 허기는 씹어 넘기는 밥알들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는 안간힘을 공유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내가 가진 불안과 굴욕이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폴더 속으로 숨어든다 이제 곧 파일명이 바뀔 것이다 용하다는 작명소를 찾아 어머니는 몰래 내 이름을 바꾸었다 그만 조용히 플러그를 뽑고 돌아눕고 싶은 밤이 올 것이다.

 

 


 

 

정은기 시인 / 경각심​

 

 

 피뢰침 부근에서 바람은 깨어난다. 하늘은 구름을 당겼다 놓으며 안식을 얻고 피뢰침은 고요를 겨냥해 날카롭다. 유리창은 방 밖의 격정을 지운다. 피뢰침이 첨단에 몰두하는 동안 구름은 흩어지고, 지평선 위에서 눈꺼풀이 떨어지는 속도로 하루는 태어난다. 피뢰침은 창문 안쪽의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잠들어 있는 오후의 거실 깊은 곳까지 붉게 물들이지 못한다. 죽음의 안쪽으로 바람을 초대하는 저녁 그림자의 기도, 모든 등장인물이 파국으로 치닫는 꿈을 꾸었다. 피뢰침의 호전성은 구름의 유동성이 키우는 것. 구름을 포기할 수 있는 구름만 피뢰침 부근으로 몰려든다. 창

 

 문은 벽의 악력을 견디고 비행기는 어두운 그림자로 거실을 통과해 간다. 지평선이 거실 깊숙이 흘러들어와 눕는 잠의 주변, 피뢰침의 각성으로 방은 온통 곤두서 있다

 

 


 

 

정은기 시인 / 선인장의 생존법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의 선인장이 말라 비틀어져 있다

차례차례 포기할 것의 목록을 작성하며

뿌리로부터 가장 먼 곳의 잎사귀,

가장자리로부터 스스로 숨을 놓는 선인장

그렇게 조금씩 죽음을 늦추고 있었다

제 숨을 한 번에 들었다 놓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라 생각하다가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생이 있을까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매일 조금씩 뽑혀 바닥에 뒹구는 머리칼과

구겨 던진 쓰다 만 편지, 그리고

어제 처음 만난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기억 정도

그러나 내가 버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소한 하나까지 가시를 세웠다

조금씩 죽는 것이

그만큼의 삶을 이어붙이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해

선인장처럼 가시돋친 불안을 껴안고

균형을 잃을 때마다 가시에 찔렸다

혼인여행을 마친 여왕개미는 스스로 날개를 꺾는다

제일 먼 곳의 자신을 하나씩 지우는 삶의 규칙, 나는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잘라야겠다

천천히 오래도록 상처가 덧나게 하기 위하여

환부 깊숙이 칼을 박고 도려내고 싶은 것이다

 

 


 

 

정은기 시인 / 단 한번, 영원히

 

 

공항에는 유리창이 많았다 온통 비행기가 지나간 구름들뿐이다

얼굴을 살짝 두드리면 하품하는 산 너머와

오른쪽 접시를 왼쪽으로 옮기는 노인의 무릎 위로 저녁은

붉은 토마토 스프처럼 끓는다

토마토 얼룩과 일회용 스푼과 함께 우리는 구겨진 냅킨의

표정을 짓는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내 아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모차에서 졸고 있는 검은 구름, 비가 내리는 유리창으로

암스테르담이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공을 지나는 동안

구름 위에서 구름의 표정으로,

나의 그림자 속에 잠들어 있는 여자를 상상했다

바람이 호수가 위를 불어나가고 기차는 아직

그녀의 무릎 언저리를 순환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표정이 없는 구름의 무늬에 비하면 내가 쓰고 있는 시는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다

종결어미를 앞에 두고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문장들,

한번도 닫힌 적이 없었던 나와 한번도 열린 적이 없었던 나

 

이렇게 멀리까지 가도 되는 것일까?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저녁처럼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옮겨갈 수 있으면 좋겠다

 

유성이 지나가는 동안 소원을 빌지 못했던 우리들은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단 한번,영원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까

 

비행기를 타면 우리는 열을 맞춰 질서를 지킨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반갑고 애틋하다

낯선 자들과 함께 서로의 죽음에 대해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함께 국경을 넘을 자격이 충분했다

 

 


 

 

정은기 시인 / 골목 끝, 앵두나무

 

 

어둠 속에서 한 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불빛이 있는 곳마다 아랫목을 펴고 눕는 밤길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허기를 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어 불빛을 물어뜯었다

 

멀어지는 빨간 불빛

불빛을 찾아 굴러가는 눈알들

담뱃불은 반짝거리고, 가로등은 점멸하고 있었고,

진동하는 휘발유 냄새

골목을 굴러다니던 충혈된 눈알들만

담장 밑에서 터져버렸다

 

좁고 긴 골목의 내부는 얼룩져 있다. 온갖 비릿함의 기원

집집마다의 내력을 알려주는 냄새가 담장 밑으로 모여들었다

추억은 가난 보다 풍성한 것, 온통 흑백이던 사진 속에서

홧홧하게 붉어오는 앵두처럼 익고 있었다

 

파밭을 지나 작업창고 옆 녹슨 철골의 그네는 밤마다 삐걱거렸고

어린 귀신들 옆에서 사람들은 가난을 나누어 먹었다

다리가 언 소녀들이 마당에서 뛰어놀았고,

아버지의 오토바이 달아오른 연통에 허벅지를 가져다 대었다

비명은 붉게 터지고, 치마 밑으론 화상을 숨기고,

언 다리에 앵두를 으깨어 발랐다

 

흰 스타킹마다 붉게 터지고 있는 앵두를 바라보면

그 붉은 빛이 눈동자에 스며들어 빨갛게 충혈될 때까지

사람들은 증오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은기 시인 / 우암산

 

쇠보다 무거운 고요

천년을 묻어둔 채

 

비바람 지는 잎에

눈물마저 외면하고

 

누리의 복판에 앉아

맑은 골을 지킨다.

 

꿋꿋한 황소의 등에

호수처럼 실린 하늘

 

산자락 늘린 폭에

상당별 길러내니

 

낮은 듯 깊은 반석을

어느 누가 아는가.

 

-시집 <사모곡>에서

 

 


 

 

정은기 시인 / 만져지는 어둠

 

 

내 안에서는 시력을 믿지 마라, 어둠의 말이다

 

몸 안의 살들이 겉을 뒤집으며 나올 때

종종 어둠을 흘리고 다닌다

바지 밑단으로 터진 솜처럼 어둠이 비집고 나온다

 

식당의 술손님들은 벽 뒷면으로 숨겨진 어두운 방의 내면을 모른다

벽을 밀고 겉이 속을 뒤집으며 들어가는 곳

맨 처음 어두웠던 자리

 

내 무의식에도 빛이 드는 유리창이 필요하다, 역시 어둠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침대 위에서 덤블링을 뛰던 소년들

체중이 고스란히 팽이 끝 송곳으로 모아졌다

상처를 새겨 넣고 겨우 움직이는 어둠 속에서 비명은

일그러지는 내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시력을 믿지 않는다

어두운 다락방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먼지의 지층을 점자처럼 짚어 읽는 일에 오히려 신뢰가 가는 터

처음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물건을 찾기 전까지

내 어깨에 기대었다 가는

겨울 하늘의 한숨,

뛰어내린 모두를 위한 기도,

얼굴 없는 신부의 사제복 같은 어둠

 

이렇게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다 보면

기억 이전의 기억들이 쌓여

몸 안에서 겉을 뒤집고 나와 긴 그림자를 이승에 흘리고 있는

어둠을 만질 수 있다

 


 

정은기 시인

1979년 충북 괴산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차창 밖, 풍경 빈곳〉이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