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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주 시인 / 언어에 대한 고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그대들을 사랑하기로 하자 언제나 불평등한 시선 아래 놓일 미문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에게 내세우지 않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로 하자 이것도 나의 고립된 언어라면 그 언어까지 버리기로 하자
가끔은 물속에서 술렁이는 땅 위에서 살랑이는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힘찬 언어들을 온몸으로 잡으며 아이의 몸짓으로 오, 오랫동안 머물러 바라보기로 하자
김비주 시인 / 봄길, 영화처럼
모아놓은 꽃들 사이로 봄이 넘나들어요 느리게 가는 꽃길 걷기, 생각 속에서 읽은 책장들이 튀어져 나오고 도시는 길을 내며 망설여요
봄 햇살에 조울던 고요가 바람의 결따라 살랑거리고 혼자 걸어요
사이사이 늘어진 하루가 화면에 잡히고 하루는 무료한 시간을 엮어서 소외된 여정을 훔쳐요
시간 되감기 생각 공중에 띄우기 초록을 화면에 채우기
셔터를 누르자 만개한 꽃들이 풍경 속으로 달아나고 풍경의 끝자락에 실려 빙긋 웃어요
디스커버리* 경주** 당신은 시간 이동에 잠시 서 있어요
흩어지던 생각들이 허공을 맴돌아요
*, ** ; 영화 제목
-시집 《 봄길, 영화처럼 》중에서.
김비주 시인 /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숨겨놓은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해 여름'은 초록이 빗방울에 돋고 주인이 두고 간 잠에는 어린 딸이 마을을 이고, 월북한 빨갱이 아빠의 그늘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간이 몇 개의 다리를 건널 때 편백나무 향은 사람을 부르고 군사정권의 마지막은 고운 첫사랑을 조각냈다
비가 올 때마다 만어사의 물고기들이 노래를 부르고 딸의 유일한 기억의 가족 나들이가 네 살에 머물러 있을 때, 아버지가 남긴 마을의 도서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속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비릿한 바람을 몰고 최루탄 속으로 굴렁대며 캑캑거린다
흑백영화처럼 나의 청춘은 영화 속에 돌돌 말려 오랜 시간을 끄집어내여 한다 사라진 모든 것은 풋내 오른 오월의 나무들을 안고 잃어버린 퍼즐을 초록이 우거진 모든 곳에서 복원해야 한다
눈물이 숨은 가장자리엔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애절한 상심이 화면을 뚫고 나와 먼지처럼 내 폐에도 쌓인다
사랑, 고귀하고 상습적인 이야기의 뒤 끝에 매달린 정치의 폭력성과 인간의 나약함이 비에 젖은 풍경을 만든다
아직, 가벼워지지 않는 내 무지의 뒤편에는 절대선이라는 편협한 논리를 가슴 밑바다에 묻어둔 채, 풍경이 탁하게 덧칠된다
* 영화 제목
김비주 시인 / 작은 혁명
그때 거기 가르마 한가운데를 지르고 노는 물이 다른 약간 되바라진 아이들에게 명명된 별명 몬로,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도 있었다 독재자로 불리어지던 덜 떨어진 몬로 교장 선생님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도 날마다 밥 먹듯이 치른 일일고사 달이면달마다 치른 일제고사의 산물이었다. 마지막 입시를 치른 무장한 최후의 용사, 열 넷의 조그만 기집애들이라고 함부로 했겠다
열넷 단발머리 소녀들의 반란이 푸른 오월을 흔들고 사람의 생각을 흔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으로 시험한 몬로* 교장 선생님을 학교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스승의 날 작은 혁명은 교실을 통하여 전달되고 수업 거부라는 총체적 현상을 실현했다 교육은 몬로 교장 선생님에게 전근을 명하였고 우리의 작은 승리는 사백팔십 명의 훈장이었다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석차로 우열반을 만들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 몬로 교장 선생님 아직 여물지 않은 밤톨만한 소녀들의 분노를 한번도 생각지 못한 까닭에 생애에 오점을 찍고 말았다
오월이 오면 생각나는 그 날, 열 넷의 소녀들은 지금도 작은 혁명 하나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을까
*몬로 - 마릴린 몬로처럼 앞가르마 탄 모습. 몬로는 좀 껄렁해 보이는 모습을 상징!
김비주 시인 / 주부생활 별책 부록
열두 살에 쿼바디스를 읽었다 옆방 세들어 살던 새댁 아줌마의 주부생활 별책 부록, 세계명작소설 이른바 똥종이의 극대치 활자에 목마른 나는 무척이나 좋았지 처음부터 끝까지 물샐 틈 없는 활자들의 전방위 체제
테스, 주홍글씨, 폭풍의 언덕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오고 그 중에서 쿼바디스는 어린 내게 세계를 말했지 사랑, 배신, 폭정, 순교, 권력을 종교와 권력은 양날의 칼 사랑은 모든 걸 극복하지
솔직히 열두 살이 읽어내는 세계가 뭐 그리 대단했을라고 활자의 폭식, 굶주린 나에겐 좋았지 결심했어 부록에 눈먼 나는 어른이 되면 주부생활을 꼭 구독할 거라고 하지만 난 아직도 주부생활을 구독하지 않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김비주 시인 / 조화
꽃인 게야 피어나길 거부해도 꽃은 꽃인 게야 사라진 시간 속에 꽃으로 있었던 오랜 저림이 화장실 변기 위 휘갈긴 파리의 문자가 생생한 화병 위 부득불 꽂혀서 아, 꽃인 게야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다 꽃의 시간들이 생에 있느냐고 목적 없는 물음표를 잠시 던져 본다
장미와 부들이 총총 꽂힌 시간 눈으로 보내다 시오리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변기 위에서, 꽃인 게야 거울을 보며 복근이 생기려다 잠시 아파서 쉬었던 시간, 과한 먹이의 양만큼 누적되는 피접의 살들을 보며 박제된 조각들을 그리워하는 생의 이면으로 꽃인 게야
시드는 잎이 없어도 단정한 모습으로 시간을 내리고 있는 그대는 꽃인 게야!
김비주 시인 / 하늘을 바라보는 아침
쓸쓸한 징후를 읽는다는 건 또 하나의 은밀한 자아를 보는 것이다 풀잎들이 바람에 휘날릴 때도 스산거리는 울음을 감추거나 여린 몸으로 바르게 서려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늘 좋거나 행복할 수야 없지만 온갖 소음들이 회색의 눅눅한 그림을 가져오는 날이면 어디선가 한쪽 다리로 오랫동안 서 있을 해오라비를 생각하곤 한다
비 온 뒤의 술렁임은 차곡차곡 쓸어내리는 풍성한 내에는 청둥오리 가족이 둥둥 떠다니곤 한다 살이 있는 것들이 수고로움의 끝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풍경을 보곤 한다 버드나무 왕성한 여름 즐기기, 녹색 잎들을 물 아래 내리고 빠르게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오늘이 눈부시게 떠오른다 쓸쓸하다거나 혼자인 것이 여기저기 풍경으로 흐르다가 사람의 몸으로 스며드는 날엔 아파트 지붕에 걸린 하늘을 쳐다본다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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