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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시인(광주) / 흰머리 독수리
결혼 피로연장 중앙에 자리 잡은 독수리 한 마리 금세 날아오를 듯 활짝 날개를 펼치고 있다
바람이 묻어있는 커다란 날개는 단숨에 하객들을 제압했다
갖가지 소음에도 칠캣*의 피를 물려받은 제왕의 품위가 의젓하다
초원을 지휘하던 날갯짓, 칼끝에서 다듬어진 깃털이 섬세하다 칠캣의 물맛을 기억하는 투명한 피 한 줌이 내장도 없는 독수리가 날카로운 부리를 들이댄다 냉동창고에서 부화된 싸늘한 야생의 발톱으로 그는 아직 무거운 날개를 쳐들고 있다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마지막 풍경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달아오른다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에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저 얼음제왕 굽은 부리가 서서히 녹고 있다
* 미국 알래스카에 있는 흰머리 독수리 보존 구역
-<문학마을> 2012년 후반 통권 제51호
김현희 시인(광주) / 복도
그는 천성이 과묵하다 주인보다 먼저 입주한 그는 쿵쿵 뛰어오는 발소리를 귀에 저장하고 입을 다문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오는 사람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 또한 그의 몫 들고나는 이삿짐의 행로도 추적하지 않고 겹겹이 쌓이는 묵은 임대의 기록도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
복도란 집의 겉옷 같은 것 단추 같은 벨을 누르고 들춰보기 전까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복도 끄트머리 흔들거리는 공공근로 김씨의 불운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한다 막다른 벽에 부닥친 1401호 독거노인 통로에 신발을 벗어두어도 냉기로 가득 찬 그 집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정착지를 찾을 동안 잠시 머무는 임대아파트는 집들의 낡은 소매 깃이다 소매를 접거나 펴거나 옷이 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몇 개의 짐을 다시 무심하게 배웅하고 흘리고 간 소음 부스러기만 복도를 서성댄다 간혹 빗나간 꿈에 화풀이하는 사람들로 긴장하는 복도, 저 밑은 벼랑이다
빽빽한 침묵의 행간, 그의 몸에 서서히 균열이 보인다 복도의 어깨가 기울어지면 여기저기 터진 솔기 사이로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층》 2012년 봄호
김현희 시인(광주) / 강부장의 수첩
여전히 그녀의 기억은 보수적이다 손글씨를 고집하는 느린 기록법 어긋난 장소가 지워지고 혼자만 아는 이상한 실적들이 재고처리 된다 미용실 원장님 생일, 헬스클럽 개업일이 얹혀있는 영업수첩엔 자신의 기념일은 빈칸이다 수첩의 지시대로 따라가고 달려간다 일정과 인맥을 결정하는 것, 또한 수첩의 몫이다 수첩의 궤적을 따라가면 보이는 계장과 대리 아이의 탈골된 어깨와 엄마의 어금니가 퉁퉁 부어 왼쪽 세 번째에 앉아 있는 손때 묻은 수첩, 신규 고객의 이름이 환하게 들어오면 뜸한 고객은 슬쩍 밀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에센스 한 병 팔았음. 수금 칠만 원. 미수금 십칠만 원… 하루의 실적이 기록된 기억보관함 자신만 아는 반품과 환불 액수가 알 수 없는 기호로 숨어 있고 파손돼 증발해버린 향수병의 꼬리를 물고 있다 실적이 곤두박질칠 때면 수첩은 더욱 예민해져서 한숨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고가의 화장품을 권하며 샘플만 애용하는 여자 쪽수 마다 굵직한 단골들의 주소가 붉은 밑줄위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문학나무> 2013년 봄호
김현희 시인(광주) / 사과의 진화
그에 맞춰 사과도 진화했다 에덴동산의 야생 사과를 길들이며 새콤함은 축소되고 단맛은 과장됐다 카자흐스탄 알마아타 숲에서 발견된 예민한 사과, 껍질을 흠집 내는 순간 속살은 반응한다 붉은 껍질 아래 숨은 사과의 속마음을 혀로 읽는다 사과의 진심은 예감보다 진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시큼한 어절이 입안을 점령한다 끝에 남아 있는 단맛을 읽기도 전 사과의 어절이 불편한 진심을 갈변으로 드러낸다
새콤달콤한 미각, 사과를 해체한다 질긴 껍질과 단단한 씨앗까지 꼭꼭 씹는다 사과의 품종을 검색하고 분류한다 사과할 수 있도록 사과의 원인을 나열한다 사과의 어절이 변하기 전 사과의 표정과 씨앗에 숨은 문장을 갈라본다 입에 달린 사과와 나무에 달린 사과는 닮은꼴이다 끝까지 살아남는 맛, 입맛을 눈치 챈 사과들은 재빨리 신맛을 버리고 단맛을 끌어 모은다 -「시인정신」2014 여름호
제14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작 김현희 시인(광주) / 굴참나무를 읽다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 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세 꺾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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