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린 시인 / 풍경의 탄생
바다를 옮기는 손이 너무 크다 맥주캔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엑스트라 흐르는 동풍경의 탄생작을 기억하는 손 고양이 한 마리 세워놓은 절벽 쪽으로 사라진다 파도는 아직 도착 전이고 등대를 활짝 열어젖힌 저녁 다리 없는 의자는 계단이 된다 절벽 위에 선 관찰자의 입장으로 숲이 된 바다는 나무를 수장시키고 물감이 흩어놓은 억새는 불빛을 키운다 점, 점, 점 섬이 되는 점 하늘 없는 구름처럼 손을 펼치면 질서 없이 놓여있는 파도가 뜯긴 봉지 속 그래커의 모습으로 부서진다 바다가 손안 가득 푸른 물감으로 쏟아진다
김경린 시인 / 그림자
그늘 속으로 사라진 너를 생각했다 아주 짧게,
종종 빛을 곁에 들여놓았지만 앞뒤가 없는 우리는 집채만 한 공간이 덮쳐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몸이 바닥과 벽에 꺾여 있다 문틈에 얼굴이 끼었으나 부서지진 않았다
낯선 것들과 익숙한 것들이 지루해져 얼굴과 얼굴 사이에 공간을 두고 우리는 각별해지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함께 하지는 않았다
김경린 시인 / 케세라세라
저를 아세요? 기억해내기 위해 하나씩 지워나가는 불안 내가 없어져야 내가 생겨나는
하필, 아버지는 재수 없는 나를 기억하고 스툴 의자에 앉아 벽이라는 것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붉은 사과는 자꾸 혀를 깨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혀끝에서 날아가는 새 잎을 떨어낸 홀가분한 나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북방유령박쥐처럼 눈이 내린다 환호성을 들으며 그동안 밀렸던 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는다
벽과 의자는 서로의 심장을 어루만진다 누군가 소리친다 몸속에 흐르는 나를 뽑아내고 싶다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의 입술이 바람의 숲으로 사라진다
헐거워지는 불안을 다시 조이고 있다 리모컨을 끊고 가벼운 농담이 되기로 했다 여덟 시 뉴스에서는 나의 행방을 묻는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혼자서 눈밭을 걷는 시간을 쿡쿡 찔러본다 혹시, 저 아세요?
김경린 시인 / 기도
문 앞에 새가 죽어 있다. 새가 죽었을 뿐인데 집 앞의 풍경이 사라졌다. 구름이 낮게 깔려 발도 사라졌다. 허공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숲이 흔들렸다.
그물에 걸린 새를 풀어준 일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새의 몸은 액체 같았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새를 빼내는데 내 뼈가 흐물거렸다. 나뭇잎이 흘러내렸다. 내 손가락마저 어디론가 흘러가려는지 파르르 녹아내렸다. 몇 가닥의 그물로 엉켜 있는 새의 목에선 떨어지는 블루베리 같은 슬픔이 묻어나왔다.
흰 종이에 새를 눕혔다. 사라진 풍경이 종이 위에 함께 누웠다. 풍경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미 붉은 노을은 빠르게 번져갔고 새는 노을 속으로 유유히 흡수되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한 점 수묵화가 생겨나고 바람의 조문이 있었다. 이제 기도는 날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더 많은 날개가 노을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김경린 시인 / 첼로와 비올라
오후의 시선이 있다 사선으로 내리는 불안, 알 수 없는 시작과 끝이 만나고 있다
배우들 목소리가 내 귀를 재웠다 목소리가 깊어질수록 모래가 귀에서 쏟아졌다 잠은 어떤 색입니까 손바닥에 묻은 여러 색에서 잠의 색을 찾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꽃병에 꽂힌 연필에 물을 주었다 번개 맞은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잠이 기억되는 편견,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생각하는데 잠이 생각났다 얼룩무늬 표범처럼
시선은 원래의 위치에 놓이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짧아지는 시간만큼 늘어나는 길 걸어오는 나무가 인사를 권하는 오른손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왼손도 있다
모래이불은 여전히 여전히 흰색 속이거나 검은색 속이구나 이곳은,
연필에서 수액을 뽑아내고 있는 누군가를 자라나는 길만큼 멀어지고 있는 나를 색채를 덧씌운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는 깊이
내일 걱정이 소리 속에서 잠들었다 어둠을 툭 던져놓고 하얀 방이 사라졌다
김경린 시인 / 소식
날개를 펴고 뛰어내린 남자는 낙하하면서 뛰어내리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빛 발자국은 가지런히 놓아두고 손가락들은 주머니에서 헐거운 고백을 합니다 공중을 할퀴는 나뭇가지들의 투명한 결핍 숲은 어제보다 밝았고 새와 고양이가 인사를 나눕니다 남자는 날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남자의 날개는 날개이고 떨어짐은 소문입니다 낯선 곳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증상은 혐오입니다 새를 물고 달아나던 구름은 남자의 날개를 보았을까요 사방이 부딪힘이고 슬픔이어서 하얀 겨울 오해 없이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나는 10년 전 죽은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봅니다 나를 지나간 발자국들은 돌연변이처럼 따뜻합니다 혼들림을 잃어버린 흔들의자의 자세로 나는 남자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김경린 시인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비가 왔다 사선으로 날아간 새의 길이 뒤늦게 출렁거리기에 웃었다 한참을 겁에 질린 개의 울음이 숨을 고르는 밤은 여전히 투명하게 어둠속에서 빛났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부드러운 우유를 쏟은 후 눈을 감았다 뜨는 버릇이 생겼다 낮과 밤은 눈과 어떻게 서로를 간섭할까 아이들이 빠른 속도로 월편을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좋아했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축축한 방은 좋아했다 말을 걸어오는 낯선 왼손 놀란 척 해야 하는데 눈을 깜빡이는 걸 깜빡했다 밤이 투명해 질수록 그림자는 낮게 찰방거렸다 이름이 지워지는 속도로 아이들이 자랐고 아이들이 작은 개집 앞을 또 지나갔다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혼자였고 개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나른한 오후 마멜레이드를 찍어 먹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현희 시인(광주) / 흰머리 독수리 외 4편 (0) | 2025.11.29 |
|---|---|
| 최정례 시인 / 뒷모습의 시 외 6편 (0) | 2025.11.29 |
| 이윤택 시인 / 그림자 군단 외 6편 (0) | 2025.11.29 |
| 박혜옥 시인 / 꿈으로 와요 외 6편 (0) | 2025.11.29 |
| 오철수 시인 / 내가 부르는 노래 외 6편 (0) | 2025.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