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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대웅 시인 / 햇빛이 말을 걸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
권대웅 시인 / 햇빛이 말을 걸다

권대웅 시인 /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 시인 / 게

 

 

바다는 언제나 정면인 것이어서

이름 모를 해안하고도 작은 갯벌

비껴서 사는 것들의 슬픔을 나는 알고 있지

언제나 바다는 정면으로 오는 것이어서

작은 갯벌하고도

힘없는 모래 그늘

 

 


 

 

권대웅 시인 / 삶을 문득이라 부르자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전

낯선 골목길 담장 아래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는 순간,

내가 저 꽃나무였고

꽃나무가 나였던 것 같은 생각

화들짝 놀라 꽃나무 바라보는 순간

짧게 내가 기억나려던 순간

아, 햇빛은 어느새 비밀을 잠그며 꽃잎 속으로 스며들고

까마득하게 내 생은 잊어버렸네

낯선 담장집 문틈으로

기우뚱

머뭇거리는 구름 머나 먼 하늘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 같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고요한 골목길

문득 바라보니 문득 피었다 사라져버린 꽃잎처럼

햇빛 눈부신 봄날, 문득 지나가는

또 한 생이여

 

 


 

 

권대웅 시인 / 나팔꽃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권대웅 시인 / 맴맴 사랑해 맴맴

 

 

 버스 안에서였습니다. 등뒤에서 무척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어 돌아보았더니 아이들 세 명이 수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끼리 손짓으로 얼마나 깔깔거리며 신명났는지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들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그들의 수화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무심코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무들도 옆의 나무에게, 건너편 서있는 나무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팔랑거리는 수백 수천 개의 손짓으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내는 저 수 많은 문자들 나뭇잎의 말들. 그러자 갑자기 곤충들의 이야기도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맴맴 사랑해 맴맴, 쓰륵쓰륵 사랑해 쓰륵쓰륵. 도시 공중으로 울려 퍼지는 이 말을 듣다가 문득 나는 깨달았습니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돌쩌귀 아래 벌레들의 꿈틀거림, 달의 곁을 스쳐가는 구름의 소리, 떼지어 날아가는 새들의 신호, 나뭇가지 까치집 속에서 들려오는 뒤척임. 그리고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더 많은 것들... 그들의 말은, 언어는, 손짓은, 눈빛은, 냄새는, 소리는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보다 아름다웠습니다.

 


 

 

권대웅 시인 / 장독대가 있던 집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둑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권대웅 시인 / 하늘색나무대문집

 

 

십일월의 집에 살았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얼키설키 모인 집들과 몇 개의 텃밭을 지나

막다른 골목 계단 맨 끝 문간방

그 집에서 오랫동안 가을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창문 밑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팔꽃, 해바라기

저녁의 적막을 어루만져 주던 가문비나무

가끔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가 슬픔을 가려주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담장 너머 이어지던 지붕과 지붕들

그 위로 햇빛이 만들어놓던 빛나던 개울들

황금여울을 따라 저녁의 끝까지 갔다 왔습니다

돌아오면 처마 밑 어둠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선가 쌀 일구는 소리 너무 커 적막해라

눈을 감고 술렁이는 내 마음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불을 켜기 힘든 저녁

하늘색나무대문을 열고 나가

해바라기가 서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나팔꽃 까만 눈동자처럼 한 시절 야물딱지게 맺히고 싶었습니다

 

 


 

권대웅 시인

1962년 서울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나귀의 꿈>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장편동화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 『마리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