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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수영 시인 / 무지개 생명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
이수영 시인 / 무지개 생명부

이수영 시인 / 무지개 생명부

 

 

벤치에 그늘이 앉아 있다

 

나는 그 그늘에 앉는다

 

특별한 그늘, 그러나 시한부 그늘,

 

창대했던 그 그늘 속에서

 

그리운 거 하나 없었는데,

 

그들은 점점

 

햇빛을 제 몸에 들이고 있다

 

그늘과 햇빛이 만드는 저,

 

무지개

 

 


 

 

​이수영 시인 /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한기가 살을 뚫고 내장까지

어서 일어나,

무섭도록 서러운 말

머리는 끄덕이는데

따스했던 나무벤치도 시려 오는데

푸른 영혼,

그대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하산 길에 웬

종이배가 하얗게 앞을 막아선다

강을 만나지 못했구나

벌써 바다에 이르러

젖은 몸 말리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푸른 영혼,

그대의 길은 어디로 통하는가

 

어허야,

학춤걸음으로 산을 내려 간다

2023년 계간 문학나무 여름호 발표

 


 

 

이수영 시인 / 벤틀리 S3

—베다니의 마리아 나의 초상 최은하

 

 

아드리아해

그물을 던지는 한 어부가 말한다

 

—내 피에 소금이 들어 있어요.

피 속에 소금이 들어간 사람은 바다를 떠날 수 없지요.

 

옳거니,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나의 피 속을 들여다본다

용솟음치는 피돌기 환한 그 한가운데

고즈넉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문지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

긴 머리채를 풀어 향유로 적시고 있는

 

네,

그 분의 발에 입을 맞춘 장본인

바로 저예요

베다니의 마리아예요.

 

 


 

 

이수영 시인 / 화폐개혁이랑 아버지랑

 

 

내 어릴 적 을지로5가 사거리 조흥은행에서

 

엄마는 제법 큰 돈다발을 주고

 

새파란 새 지폐 몇 덩어리를 받아들었다

 

무게와 부피에 관한 엄마의 산술적 설명

 

보다는 교환의 경이로움에 두 눈이 반짝거렸다

 

엄마, 아버지 말이에요

 

내 어린 날의 싱싱했던 아버지로 바꿔주세요

 


 

 

이수영 시인 / 볼보

-너의 눈이 호수 김춘희

 

 

파란 호수가

내 눈 안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아버지

 

―네 눈이 호수예요!

아,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시로 말했다

그렇게 시는 나를 향해 윙크하며

나와 놀자고 졸라댔다

 

-내 눈이 호수야!

아버지의 진심으로

나의 호수는 늘 잔잔했다

스스로 정화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온갖 생명들을 가슴에 안으며,

 

 


 

 

이수영 시인 / 제네시스 EQ900 3.8

-세계의 창 김종훈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

아버지처럼 든든한 무게감

 

누구라도 든든하게 기대고 싶다면

제네시스를 운전함이 옳다

묵묵히 감싸안는 침묵의 보살핌

끝내는 눈물보가 폭발해도

받아주고 또 받아준다

완전무결하게도 속 깊은 정

 

제네시스와 함께

날로 새롭게 열어간다

세계의 창.

 

 


 

 

이수영 시인 / 애도의 시간

내 영토가 사라져 간다

내 편이 떠나간다

뭉텅이뭉텅이 잘려나간다

더욱 홀가분해지기 위해

남아있는 것

가여운 것들을 버려야 산다

열차는 출발한다

몰약나무 잎새 향기로움 저편

미르 우주정거장 그 너머로

달항아리

눈물,

조요한 새벽

열차는 출발한다

기적을 울리면서

사람 마음빛 고운 날

달마의 시간

애도의 애도를 위한 시간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웹진 시인광장202310월호 발표

 


 

이수영 시인

서울 출생. 숙명여대 졸업. 월간 <문예사조> 시인상. 시집 『깊은 잠에 빠진 방의 열쇠』 『시간의 반란』 『언어로 만든 집 한 채』 『금빛 해를 마중할 때』 『어머니께 말씀 드리죠』 『무지개 생명부』 『안단테 자동차』 『미르테의 꽃, 슈만』 등. 시선집 『슬픔이 보석이 되기까지』, 산문집 『잠시 또는 영원의 생각』 등. 서정시학상, 천상병시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서울강남문학상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