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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향숙 시인 / 달빛 성분 검사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
김향숙 시인 / 달빛 성분 검사서

김향숙 시인 / 달빛 성분 검사서

 

 

달빛 한 조각 책상에 올려두었다

재물대 위 광학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핀셋으로 한 자락 얇게 벗겨낸다

 

세포마다 애간장 타는 냄새와

백일홍의 젖은 숨소리가 묻어 있다

울음을 어루만지던 서늘한 달빛

가을 오동잎에 내려앉은

마지막 달빛이 야위었다

 

꽃잎에 묻은 지문과 뒤뜰을 지나간 발자국

뜨락을 쓸고 간 치맛자락의 무늬도 보인다

달을 마중 나오던 하얀 박꽃과 달맞이꽃

분꽃의 숨소리도 들어 있다

 

달빛이 모과나무 가지에 앉아 있을 때

나지막이 깔리던 밤바람

먼바다를 건너온 돛의 거친 펄럭임과

달의 맨손에 묻은 기도의 성분을 살피는 중이다

 

만월로 몸을 부풀린 신음과 문양을 관찰한다

낭떠러지를 걷어 달라는

순도 백 퍼센트 염원도 내포되어 있다

달의 그늘진 뒷면엔 기도 한 줌과

당신의 빈손도 들어 있다

 

분석된 달빛을 기록해 놓는 밤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는 달빛은 맑고 따뜻하다

 

-시집 『질문을 닦다』 실천문학사, 2023.

 

 


 

 

김향숙 시인 / 북극곰

 

 

거대한 유빙 너머 눈 덮인 침엽수에도

검은 발톱이 있어요

공중을 할퀴는 우듬지에서 구름이 긁혀 나와요

 

냉장고를 열면 가끔 검은 내장이 쏟아져요

북극곰은 몇 년째 우리 집 주변 한쪽에

으르렁거리는 소리로만 남아 있어요

 

식욕이란 순백색의 앙상함,

빙하는 새끼 곰을 잡아먹어야 하는 분열을 겪고 있어요

 

오후에 펼쳐지는 먹이사슬은 엉망이에요

하늘과 맞닿은 서쪽부터

마구잡이로 피의 포획이 번지고 있어요

 

백야는 둥둥 떠다니는 고립이 아닐까요

유빙은 더 잘게 조각나고

그 틈에서 허기진 내장을 내보이죠

 

지평선이 저녁놀을 삼키고 나면

순식간에 인공위성이 별들의 포식자죠

백야를 자처하는 네온이 짧은 겨울을 사육하고 있어요

 

인간도 멸종에 던져질 때가 올 거예요

야산에 버려진 냉장고처럼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지구가 좀 더 기울어져요

 

동면에선 태양처럼 기도가 없어도

북극곰은 앞발을 꼭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봐요

 

나는 사육만 당하고 있는 야윈 북극곰에게 휴식을 주려고

꼬리에 연결된 플러그를 뽑았어요

 

-『모던포엠』 2021. 7월호 <이달의 작가> 중에서

 

 


 

 

김향숙 시인 /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산 1번지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경사진 주소를 등에 지고 다녔다

옆집이 옆집을 붙잡고 견디는 집들

조금씩 침범한 측량 선으로 묶여 있다

옆집의 질문에 옆집이 대답하는

가늘고 낮은 말소리들

 

여차하면 굴러갈 주소들을

꽁꽁 묶어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그런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가팔라졌지만

흐린 날엔 지붕을 달리는 폐타이어들을 손보곤 했다

아주 가끔 지인들이 양손 가득

봄 햇살이나 납작한 소식들을 들고 찾아오면

덩달아 따뜻해지곤 했다

 

번지수를 등에 지고 다닌

집배원들은 옆집과 옆집을 섞어 배달했지만

목련 나무나 우물가 허물어진 담이

서로 번지수를 대신했다

헉헉거리는 오르막을 껴입고 다닌 사람들

찢어진 봉지 난감한 속들이 흘러

저 아래로 굴러가곤 했다

 

제비들은 처마 밑이라는 주소가 있었지만

산비탈 아래 판잣집은 문패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빛과 별빛을 이어 붙이면

꼭짓점마다 당신이 살고 그중 어딘가에

내가 살던 경사진 집이 있었다

 

 


 

 

김향숙 시인 / 싸리나무

 

종아리에 싸리나무 흔적이 있네

아버지 꾸중이 다녀간 날이었네

천방지축의 나이

주먹을 쥐고 아를 앙다물 때

여린 싸리나무 회초리가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주었네

눈물과 후회

원망이 묻어 있는 그 기억을 만지면

참싸리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네

소쿠리와 채반이 되던 싸리나무가

몸에 스며들어 나를 일으켰네

스디쓴 그 맛

종아리에 새겨진 문신이

약초가 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의 싸리나무였다는 걸 깨달아

내 여린 뼈가 단단히 여물어갔네

여름이 지날 때쯤 뒷산에 피던 분홍꽃

사방에 날렸어도 지나치기만 했는데

회초리를 든 아버지가 보이네

낭창낭창 휘어져도 부러지지 말라던 말씀

늙어 회초리를 들 기운조차 없으셔서

내가 싸릿대를 꺾었네

싸리꽃은 여전히 피어나고

밑줄을 긋던 말씀은

내 몸에 붉은 꽃으로 남아 있는데

아버지는 다시 피어나지 못하네

한 줌 싸릿대를 안고 산을 내려오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싸리꽃 붉게 피어나네

 

-제18회 평사리문하상 수상작

 

 


 

 

김향숙 시인 / 마리오네트의 저녁

마을은 앞집과 옆집이라는 말로

고요해진다

전압이 다른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만나

정전되었던 집 안을 모두 잊은 듯,

불빛 안에 모여 있다

헝클어진 풀리지 않은 집들

좀처럼 송수신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위치를 끄고 방에 갇힌다

얼키고설킨 한 뭉치 전선 속에서

집마다 다른 자세로 저녁을 맞는다

네트워크를 초월한 새와 풀벌레 울음은

자신만의 발신처가 있겠지만,

자체의 반경에 마음이 묶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불을 끄고 이내 가지런해지는 인형들

불 켜지는 무대는 다 전깃줄의 끝

그 밑에서 그림자들의 공연이 환하게 펼쳐지지만

전선은 목적지가 분명해서

끝내 불을 켜지 못해 캄캄한 관절들이 덜그럭거리는

마리오네트의 저녁이 온다

 

 


 

 

김향숙 시인 / 장마

 

 

​국숫집 마당에 젖은 국수가락이

하얀 기저귀처럼 흔들린다

 

햇볕이 나면 보송보송 말려

시장 골목 구멍가게로 배달한다

국수 값 몇 푼으로 유지하는 가족의 생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국수가락이 젖는 날에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장대비가 내렸다

한숨으로 허기를 달래고

마르지 않는 궁핍으로 앞치마를 동여맸다

 

장마가 지면 근심도 길어져

밀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국수를 뽑던 가장의 빈자리에

고단했던 시간들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국수가 길어지던 날 빗물에 풀려 버린 끈

주인 없는 앞치마가

빈 벽에 걸려 비바람에 날리고 있다

 

하늘에서 가늘고 긴 소면이 내리는 날

물의 가락을 뒷산이 후루룩 말아먹는다

장마 때마다 국수를 드시는 아버지

산소 앞에 식구들을 불러놓고

잔치국수를 대접한다

 

국수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이

널린 국수 가락 사이를 비집고

숨바꼭질하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국물 위로 떠오르는 밤

 

눅눅한 국수가락이 기억 속에 출렁이고

퉁퉁 불은 빗소리가 뒤척이는 밤을 적신다

 

-제2회 해동공자 최충문학상 전국공모전 수상작

 

 


 

 

김향숙 시인 / 안부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어둠이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

짧은 안부 하나를 남긴다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도

사람의 목마름을 느끼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으며

스쳐지나는 인연에도 감사하다

 

건강한 삶이 얼마나 가슴 설레며

찡한 행복으로 가슴 저미는 일인지

코로나로 힘든 시절을 만난 지금은

종식이란 낱말을 되뇌며

 

내 안에 새겨진 인연들에게

건강한 안부를 나누고 싶다.

 

 


 

김향숙 시인

경북 상주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이수. 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제18회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시부문  수상. 제2회 해동공자 최충 문학상 대상 수상. 제3회 황순원 디카시 대상 등을 수상. 2021년 안정복문학상 수상. 2022년 호미문학상 수상. 시집 『질문을 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