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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연 시인(합천) / 아프리카 초원의 밤
선잠과 온잠 사이 새끼 안은 어미가 맹수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열어 둔, 그래서 발달했을거래 어미들의 청각은
냄새가 전달되면 사녕에 실패하기에 고양잇과 동물들은 바람을 거슬러 온대 그래서 발달했을 거래 어미들의 후각은
수만 개 길들로 어미들은 흩어졌지만 원시의 잠을 닮은 어미의 선잠들이 그 오랜 기억에 묶여 새끼의 숨, 지킨다
-《나래시조》 2023 여름호
김종연 시인(합천) / 알고리즘
국화차 우러날 동안 잠시 널 떠올렸어
새까만 개미군단 끝없는 행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너는 다시 부활해
승리한 개선장군이 쏟아낸 전리품처럼
눈물의 흔적까지 당당함을 과시해
우리가 남남이라고 몇 번을 외쳐야 해?
-《정형시학》 2023, 가을호
김종연 시인(합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솔밭산 공원묘지
당신께서 덮었던 책장의 마지막을 펼쳐 뒷이야기를 씁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시점이 자꾸 흐려져 글들이 흩어지네요
더 이상 건너올 수 없는 그 편의 언어들은 몇 번의 번역기를 돌려야 닿을까요 대답을 기다립니다 답신 빨리 주소서
둥글고 단단해진 수천 개 동음이의어 다 잊은 듯 다 버린 듯 그렇게 누웠지만 골짜기 가득 서린 고요 압축파일 같습니다
세밀 궁체로 알알이 그렇게 써 내려간 당신의 생애가 여전히 진행형이길 한나절 바람에 기대 바람을 소지합니다
-시조문학동인 운문시대 18호 『소금꽃 다녀간 뒤』
김종연 시인(합천) / 욕바우*
개명이 쉬운 세상 너도 나도 이름 바꿔 더러는 운명도 바꿔 새 삶을 산다는데 내게는 꾸지 못할 꿈 오르지 못할 나무네
그 날의 욕 파편이 살 속에 깊이 박혀 날궂이 하는 날은 욱신욱신 아픈데 날마다 항변해 봐도 듣질 않네 아무도
남천 재방 공사 때 인부 향해 욕한 사람 제발 양심 선언해 내 한 좀 풀어주소 억울한 이름 달고 산다 팻말 하나 세워 주소
-운문시대 동인지 제19호 <활시위 대신 울어 그믐달 휘어지고>
김종연 시인(합천) / 이정자*를 노래함
아버지는 내게 연애를 하려거든 조선 남자를 만나라 아버지, 우리 마을엔 조선 남자가 없어요 맞아서 터진 볼보다 그 말이 더, 억울해요
일본 남자는 내게 조선인 피가 섞인 너랑은 이제 끝이야 연애의 결말은 공식처럼 똑 같아서 그들의 이별 통보는 토씨 하나 안 틀렸네
아이는 내게 마사꼬, 고마야 진짜 이름은 뭐야 엄마?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괴로움을 몰라도, 모르면 좋을 일 별 아래서 알린다
일본 친구는 내게 뭘 고민해, 왜 고민해, 귀화해 그럼 쉬워 아이를 생각하면 귀화 동화 스치고 직업도 얻을 수 있지만 멸망하지 나는
조선은 내게 아버지 고향집에 핀 도라지 복숭아꽃 처음 입은 노랑 저고리 겉도는 마음처럼 엄마의 치마폭 뒤에서 훔쳐보는 낯선 손님
단카는 내게 중학교 국어시간 첫 만남의 순간부터 멎지 않는 딸꾹질처럼 나를 자꾸 불러 피범벅 모래알을 삼키던 그날을 견디게 했어
이정자는 내게 교집합 하나 없는 책 속의 재일 여인 자꾸만 말을 걸어 단수 아닌 복수로 그녀의 혼잣말 노래가 합창 같아 자꾸만
* 재일 조선인 2세. 조선인의 회한과 슬픔을 일본의 전통시가 형식인 단가로 노래했다
-《시조시학》 2023, 여름호
김종연 시인(합천) / 허두재비*
꽁무니 자리지만 신명은 내가 제일 사람들 불러 모아 굿판을 키우면 어깨춤 춤사위 따라 온 마을도 덩실덩실 풍물패와 구경꾼 하나 될 수 있다면 상쇠가 아니면 어때, 치배가 아니면 어때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상 만들어가는 나인걸
*풍물굿의 맨 뒤에서 악기는 다루지 않고 춤으로 흥을 돋우는 사람.
김종연 시인(합천) / 글씐바위*
붓끝이 닿는 순간 천 년의 잠에서 깨
온몸으로 받아 적은 여든의 아린 연서
반가운 기별은 왔는지 파도가 자꾸 묻는다.
*글씐바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풍랑을 피해 잠시 보길도에 머물 때 임금을 향한 원망과 그리움을 담아 지은 한시가 새겨져 있는 바위
김종연 시인(합천) / 사진 속 씨오쟁이
헛간에 매달린 어느 해 기억 속엔 성역을 지키려는 장수의 칼끝처럼 한 웅큼 생명을 품은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눈 맞추는 햇살조차 만나기 힘든 날도 사진 밖 세상 향해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기억을 붙들기 위한 노 시인의 독백 같다
-<나래시조> 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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