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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원 시인 / 나는 나를
나는 내가 뿜어낸 공기다 나는 목적지 없이 금방 나갔고 나만 남아 집을 지킨다 나는 형태가 가변적이어서 구석구석 움직일 수 있다 소파 아래 책장 위 저금통 안 샹들리에 옆까지 내가 발견하지 못 하는 것들을 나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뿜어낸 공기들의 시체에 놀란다 나도 언젠가는 죽겠구나 나는 내가 잊어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성당 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광대를 따라간 날 무당이 '너에게 옛날이 어디 있어' 하면서 저주의 웃음을 던지던 날 금지된 얼음과자를 빨아 먹던 날 나는 내가 읽다만 책들의 끈적거림을 느낀다 나의 것이 되지 못 하고 녹고 있는 계시 금고 안에는 내가 지닐 수 없는 시간의 골동품이 가득하다 나는 어디 있을까 방파제 끝에서 파도를 맞고 있을까 남의 집 유럽식 정원을 기웃거리고 있을까 시장 한 구석에 앉아 소란에 귀를 막고 있을까 나는 언젠가 돌아올 나를 위해 베르가못 향기를 준비한다 피로에 젖은 내가 침상에 누워 바르르 떨고 있을 때 나는 나의 자비로운 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나를 울게 할 것이다
윤태원 시인 / 밤의 정신병동
떠돌던 웃음이 뼛속에 스며드는 시간 하얀 천들이 내려와 침대를 휘감는다 붉은 종이 등을 달고 자작나무숲으로 달려가는 마차의 거친 숨결 바로 눈앞에 바큇살 어지럽다 가파른 언덕 자갈길 쏟아지는 소음 튀어나온 뿌리에 부딪혀 기울어지는 영혼들
엇박자로 뛰는 말들 말발굽 소리는 불규칙하게 대지 위로 울린다 정처 없는 행진, 마부가 없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살쾡이의 발톱, 매의 부리 말들의 몸에서 솟구친 피가 어둠에 번뜩인다 나는 뛰어올라 마부가 된다 고삐를 잡자 근육에 경련이 인다
뇌의 부속들이 처렁거리는 소리 안간힘으로 의자며 창문이며 서로를 붙들고 있다 목적지를 잃고 늪으로 어둠으로 곧 절벽 앞에 당도할 것이다
말들이 고르게 숨 쉬게 하자 말들의 발을 맞춰 뛰게 하자 한밤의 숲속을 누비며 안식처를 찾자 저 멀리 따뜻한 모닥불을 향해 감각의 손으로 마차를 이끈다 모두가 눈을 감는다
구조 환상일 뿐인데 나는 신이 된 듯 팔을 벌리고 적막 속을 빙빙 돈다 회진을 끝내고 돌아서는 발밑에 과자봉지가 떨어진다
윤태원 시인 / 잠을 추적하는 벗에게
당신이 기계인가요 전기나 건전지로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는,
약을 신처럼 받들지 마세요 잠시 지팡이로 머물다 떠나는,
계절의 파도에 몸을 맡기세요 너울대는 색색의 꽃잎들을 팔 벌리고 받아들이세요 자연인지 마법인지 모호한 아름다움 들판 가득 수놓인 이불 위로 누우세요
막막한 천정을 걷어낸 여름밤 당신의 잃어버린 멜라토닌 뇌 속을 돌던 수면 올챙이들 별이 되어 우주 가득 반짝입니다 두 눈에 필요한 만큼 담으세요
라벤더, 카모마일 차에 마취되어 상상의 허브농원으로 가세요 애인과의 숨바꼭질 느린 동작으로 그려질 겁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둘 다 향기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양파를 썰고 칡넝쿨을 깔아 일상을 해독하고 구석엔 너도밤나무 한그루 키우세요 인공으로 가득 찬 숙소를 자연으로 중화시키세요
잠이 나를 기다리게 하세요 의자에 앉아 윤태원의 시집을 읽으세요 달리고 싶어 안달이 난 기차가 되어 잠의 기적소리 침상을 들썩일 때 조용히 몸을 던지세요 지루한 시집은 플랫폼에 내팽개치고
도마뱀이 되어 먼저 누워 있는 걱정 꾸러미 발로 차서 쫓아버리고 전등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지난날의 욕망 밤안개가 체포해 가도록 창문을 열어두세요
항상 같은 시각 아침이슬이 당신의 이마에 성수로 흐르도록 꽃그늘에 베개를 놓으세요 신의 축복 속에 매일 새로 태어나 빛이 되어 움직이는 나의 벗이여!
윤태원 시인 / 수곽
내 안의 그릇은 얼마인가? 얼마나 담을 수 있는가? 얼마나 튼튼한가? 얼마나 예쁜가? 얼마나 키울 수 있는가? 혹시 구멍이 뚫려 새는 곳은 없는가? 채우기에 급급해서 욕심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는 않는가? 넘치게 채울 수는 있는가? 채워서 흘려보낼 곳은 있는가? 그런데 내 안에 그릇이 있기는 한가?
윤태원 시인 / 청춘이 녹아서 흐르는 날
뜨거운 용광로 안 청춘을 녹여내면 언젠고 그 열기 식을 테고 정성 다해 갈고 닦으면 마침내 찬란히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있을 거다
불멸하는 강직함은 물론이거니 영원을 품고 천사를 잉태한 순수의 결정 세상 유일무이의 보석 모두의 넋을 빼앗을 법한 아름다움 존경 찬사 시기 질투로 한껏 샤워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그런 찬란한 보석이 되어 있을 거다 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뜨거운 용광로 안에 청춘을 녹여내는 이 땅의 저물어 가는 젊음들아
녹고 녹고 녹아내리면 결국 녹아버리고 말 테니 어서 도망쳐라
네가 날 수 있는 곳에서 청춘이란 날개를 펼쳐 날아가길 진심으로 바라기에 나는 말한다
두려워 말고 도망쳐라 도망치고 포기하고 두려워 말라
윤태원 시인 / 쓰읍
벼 이삭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 줄기 사이로 뻗은 햇살에 솔방울이 마르는 소리 태양의 화산 폭발 소리 과수원이 익으며 팽창하는 소리 길 위의 자갈들이 시기하는 소리 옷자락이 바람을 붙잡는 소리 모퉁이 가게 파리채가 우는 소리 파장한 장터 천막이 그늘을 키우는 소리
하루의 방랑 후 돌아온 불꺼진 창 귀에 담아온 유령들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영원히 오지 않을 답문을 기다린다 그대와 같이 덮은 솜이불이 속삭이는 소리
윤태원 시인 / 내가 사라져도
아이들 어리둥절 연극인지 귀여운 질문 끝 슬퍼하다 학교에 가고 놀이공원 열차 타겠지
아내의 손수건 마르지 않고 얼굴의 눈물 주름 깊어지다 양파 썰고 조기에 칼집 내겠지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 빈 자리 공허 질겅대고 내뱉다 한숨 가득 짊어지고 총총히 여름 여행 가겠지
남기고 간 먼지 옹기종기 모여 오래된 주인 기다리다 새로운 먼지에 섞여 어디론가 실려가겠지
음악을 멈춘 스피커 우퍼의 절망 어두운 거실 둘이 보초 서다 누군가의 손가락에 블루스 켜겠지
수변공원 계란꽃 마른 수술 힘없는 혀 내밀고 바람 맞다 스며든 영양분 빨아들여 노랗게 차오르겠지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그림자처럼 긴 항구 애토록 앉아 있다 기둥에 밧줄 감고 매듭 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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