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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기 시인 / 구름의 구간
구름 한 뭉치를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었다. 절구질에 구름이 가끔 튀어 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곱게 빻아져, 자기끼리 뭉치고 헤어지곤 했다. 흙담을 드나드는 안개처럼 몸속에서 물기가 맴돌았다. 잘 빻아진 구름은 햇살과 함께 어머니의 물기를 빨아드렸나. 구름이 허파를 점점 조여들게 하더니 어머니를 삼켰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작불을 지피자 굴뚝이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연기 품은 구름이 점점 부풀어 올라 어머니를 내놓았다. 깨를 볶듯 마당에서 물방울이 춤을 추었다. 몸속에 물기 맺힌 어머니가 식솔들에게 슬픔의 구간을 줄였다.
ㅡ시집 『빨강 뒤에 오는 파랑』 (애지, 2019)
손창기 시인 / 사랑
사랑한다는 건 벌새처럼 거미줄을 훔치는 것 점액질 그물에 걸려드는지도 모른 채 그리움의 한 줄을 찾으러 가는 것 1분에 6000번의 횟수로 심장 속에 벌새의 날갯짓을 새겨 넣는 것 그대가 비워둔 마음 한 줄에 한 가닥의 실을 얻어 겨우 자신의 둥지를 꿰매는 것 때로는 그 한 줄도 얻지 못해 끈적이는 거미줄에 걸려 몸이 다 빨아 먹힌 줄도 모르는 것
손창기 시인 / 헹가래
주둥이와 등으로 참돌고래 다섯이 하나를 물 위로 밀어 올린다 이렇게 죽음을 바다 위로 헹가래칠 수 있을까 눈감은 동료의 입과 목덜미, 등과 배를 매만지며 모든 얼굴들이 죽음의 둘레를 돌자 저장된 기억들이 소용돌이치고 만다 감포 바다가 입을 닫고 깔그랑한 수의를 깔아 놓는다 그들은 그 자리의 물이끼를 심장에 채운다 마지막 축제는 결국 물의 흐름에 몸 맡겨야 하는 것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빠져나간 비늘이 바닷가로 휩쓸리면 몽돌이 되고, 돌에 반사된 노을은 잠시 비늘을 껴입고 헤엄쳐가는 것을
손창기 시인 / 파꽃
파 속을 파먹는 건 꽃 속의 씨앗들인가 파 속을 먹으면 먹을 수록 땅 밑부터 껍질에 힘줄이 생긴다 뼈가 박힌다 제 목을 굽혀본 적 없는 파꽃 남에게 씨앗은 될지언정 단 한번도 식탁에 오르지 못한 파꽃 모가지를 꺾고 나서야 곁줄기들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굽힐 줄 알아야 옆자리가 몰랑몰랑해진다
손창기 시인 / 어둠을 모디린다*
눈대중으로 모를 모디린다 모내기 후 포기 빠진 곳, 할머니는 분명 어둠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물처럼 촘촘히 모디리고 나서야 햇빛이 들고, 바람이 일고, 거울이 된다 고단한 하루의 무게로 내려앉은 발자국을 스르륵 덮어버리는 햇빛, 포기 사이에 뜬 제 그늘까지 동여맨다 바람은 기우뚱한 모를 세우며 팽팽하게 오와 열을 당겨 놓기도 한다 순간, 무논이 젖빛 물거울로 떠오른다 물거울에 담겨졌던 미루나무 그림자, 산그늘 끝까지 껴안고 있는 저 울음들 연한 그림자 속, 할머니가 발을 떼자 진초록으로 옅은 어둠이 다져지고 있었다 뒷짐 지고 마을로 드는 할머니의 환하고 굽은 등이, 저 달이다 엉성한 밤하늘에 촘촘한 별들 하나씩 모디리고 있었다.
*모디린다: 모 사이 빠진 곳을 보식(補植)한다는 뜻의 경북 방언.
손창기 시인 / 호랑이
주물 끼얹은 듯 불타오르는 단풍들 너희는 죽음에 이르는 고빗사위에 가을 호랑이를 빚어내려는가 잘게 썬 빛깔과 짙은 어둠을 우려낸 단풍들이 포효하려는가 익돌근이 만들어 놓은 큰 입처럼 발갛게 타는 노을, 불씨 한줌 넣어 반죽하려는가 몸을 옴나위할 수가 없다 널룽널룽 벗어버린 호랑이 가죽이 땅에 군데군데 늘어져 있다 손창기 시인 / 빨강 뒤에 오는 파랑
사냥꾼에게 동굴이란 그림사원寺院 인지도 몰라 빛과 어둠이 만나는 순간, 바위벽에 손바닥을 대고 하늘의 노을빛을 끌어다가 찍었을 거야 동굴 떠나기 전, 손의 둘레를 그려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몰라 그대를 만져보고 싶어 손바닥만 남았는지 몰라 4만 년 전, 마로스 동굴은 바위벽이 편지였는지도 몰라 노을과 어스름이 만나는 순간, 파랑이 몰려올 때 박쥐가 동굴을 떠나 이 소식 전했을 거야 새벽녘 박쥐가 돌아올 때, 사냥꾼은 세상 밖으로 나아갔을 거야, 여전히 손바닥은 빨강색의 윤곽 안에 있으니, 전하고 싶은 말들 가두고 있었을 거야 누구든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빨강 뒤에 오는 파랑을, 그대가 내 손바닥에 포개질 때 말들과 온기가 고스란히 합쳐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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