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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서연 시인 / 응달에서 햇살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5.
최서연 시인 / 응달에서 햇살이

최서연 시인 / 응달에서 햇살이

 

 

시퍼런 응달이 걸터앉은 담벼락에

어깨를 맞대고

추위를 나누는 쓰레기통이 서있다

가끔 떠돌이 먼지가 쉬고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창문도 없고

문고리도 없는 단칸방이다

종종거리는 호기심으로

막힌 귀를 세우니

깨지고 찌그러지고 닳고 구겨진 상처들이

서로 보듬으며

은실 풀리는 봄비에 돋는 잎차례처럼

귀를 맞추는 화음이 들리고

고양이 나비수염 같은 햇살이 날아오른다

나는 한 뼘 바깥이라 여겼던

흐린 안경을 닦으며

한사코 한쪽으로만 귀 틀어진 마음의 터를

온몸 손이 되어, 짚어본다

 

-2014년 리토피아 여름호 신인상 작품 중에서

 

 


 

 

최서연 시인 / 날갯짓

 

 

지하철 안에 나비가 있었다

 

어느 문으로 탔는지

어느 역에서 내렸을지

 

나비 같은 네 생각이 났다

 

꽃밭을 뒤로하고

세상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싶은

 

너의

쉼 없고

치열한 날갯짓

 

 


 

 

최서연 시인 / 누군가 내게 물어오면

 

 

누군가 내게

달을

본 적 있냐고 물어오면

그저

깜깜했노라고 말하리라

누군가 내게

그 후

사랑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오면

몇 겹의 인연도

물안개가 되더라고

말하리라

누군가 내게

사는게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달도 사랑도

내겐 과분한

선물이었다고 말하리라

 

 


 

 

최서연 시인 / 숟가락

 

 

 이빨도 없고 잇몸도 없고 이것도 저것도 가리지 않는다. 보름달로 차오르기도 하고 반달로 빠지기도 한다. 가끔은 아주 엎어져서 그믐달로 마르기도 한다. 밥상에서 입맛 다셔도 먹지는 않고 그저 수발만 든다. 엄마 젖 뗀 이후부터 내 입에는 이 달 저 달이 뜬다. 깜깜한 입을 환 히 밝히는 달이, 뜨지 않은 날은 없다. 꽉 쥔 내 손을 펴면 저처럼 환한 달이 될 수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최서연 시인

2012년 순천문학, 2014년 《리토피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물은 맨살로 흐른다』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 출간. 현재 〈막비시〉 동인. 순천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