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진경 시인 / 세상의 불빛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김진경 시인 / 세상의 불빛

김진경 시인 / 세상의 불빛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 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김진경 시인 / 눈물

 

 

하루 아침 추위에

 

은행 나무가 후드둑 잎을 떨어뜨린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한꺼번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황망히 흘리는

 

황금빛 눈물

 

 


 

 

김진경 시인 /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여수에서 한밤중에

서울로 떠나는 자연산 도다리 수송차

물탱크에

상인들은 작은 상어를 집어넣는다

 

도다리들은 상어 때문에 긴장하여

흐물흐물 늘어질 새가 없다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보라

도다리는 바다에서 건져올릴 때처럼

펄펄 뛰고 있다

 

북한 핵문제로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고

조용해진 거리의 건물 입구마다

우리는 적당한 공포로 숨죽였다

자연산 도다리처럼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김진경 시인 / 빈집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 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 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김진경 시인 / 파랑새는 있다

 

 

붉은 벽돌의 옥사

내 방 창문의 한 귀퉁이는 늘 깨어져 있었다.

어느 겨울날 눈을 떠보면

머리맡에 흰 눈이 소복히 쌓여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는 구치소도 이사가고

세상의 밖으로 물러난 노인네와 아이들

그리고 비둘기들 한낮을 소일하는 독립공원.

나도 모처럼 세상의 밖으로 나와

옛날의 내 방 창문 앞에 서 보니

깨어져 있던 창문의 모서리가

여전히 깨어져 있다.

아, 그랬었군.

눈은 여전히 내려

머리맡에 소복히 쌓이고 있었군.

여전히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군.

하얗게 서리 앉은 벼들은

세상에도, 세상의 밖에도, 세상의 밖의 밖에도

내 몸 밖에도, 내 몸 안에도, 내 몸 안의 안에도 있었군.

아, 여전히 서리낀 벽에 하얗게 입김으로 그리는

파랑새는 있었군.

 

 


 

 

김진경 시인 / 소식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서릿발 일어서는 들판의 후미진 구석에서

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웅크리고 있다고도 하고,

바람은 늘 거대하게 날개를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무사하신지요.

 

한때는 그대가 치자꽃 핀 울타리를 따라 걷고 있다 해서

온종일 치자꽃 향기에 휩싸이기도 했고,

한때는 그대가 서리가 내린 들판을 걷고 있다 해서

칼날 같은 서릿발 위를 서는 것도 같았습니다.

참 많은 세월과 길을 걸어 왔습니다.

 

감꽃  하얗게 핀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했고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내가 나일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또한 슬픔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듯이 당신에 관한 많은 풍문이

당신의 빈자리를 가르키고 있을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무한한 연민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덧없이 왔다 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란 말씀인 줄을 알겠습니다.

무사하신지요.

 

바람은 거대한 날개를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저에게 치자꽃 향기를 한 번 더 보내 주십시오.

이제 사랑하는 것들 위에 치자꽃 향기 하나 보텐들 어떻겠습니까.

 

 


 

 

김진경 시인 / 이팝나무 꽃 피었다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려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김진경(金津經) 시인

1953년 충남 당진 출생.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시 당선. 고교 교사 재직 중이던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 이후 교육운동에 투신. [오월시] 동인.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 등 역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통일시대교육연구소 소장 역임. 2000년 12월 시집 <슬픔의 힘>으로 제5회 시와시문학 작품상 수상. 2006년 『고양이 학교』로 프랑스 제 17회 앵코뤼브티블 수상. 2007 한국문학 시부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