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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명선 시인 / 추녀 끝이 소란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오명선 시인 / 추녀 끝이 소란하다

오명선 시인 / 추녀 끝이 소란하다

 

 

저 놋쇠물고기

 

작은 종 하나에 낚였다

 

풍경소리, 찌 흔들리듯 허공에 출렁거리고

 

누군가 산허리에 안개그물을 던진다

 

추녀가 댕그랑댕그랑

 

이 날강도야!

 

어서 풍경 한 장을 내 놓아라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에서

 

 


 

 

오명선 시인 / 못2

 

 

나는

잠자는 듯 살아 있다

 

소리를 잃은 것은 오래,

탕탕, 내 머리를 쳐야 목이 트인다

 

붙박인

나의 복종은 단단하다

 

목까지 잠긴 벽을 뽑을 수 없다

 

 


 

 

오명선 시인 / 나무들의 기억파일

 

 

나무가 제 몸에

제 깊이만큼 시간을 새길 수 있는 것은

속살을 단단히 감싸 쥔 수피樹皮 때문이다

 

느슨한 가지를 탱탱하게 잡아당기는 햇살

순간, 뼈마디를 늘려주는 것들은 발 밑에 있다

잎들의 향기를 박아낸 허공은

수만 번의 기록 위에 다시 계절을 쓴다

 

모두가 제 몸의 기억,

바람의 중심에 서서

제 깊이만큼 그늘을 짠다

 

사후에야 볼 수 있는 저 비밀파일,

 

한 번도 누구의 중심이 된 적 없어

나이테를 그리다 만

미완의 압축파일,

 

바람이 채워야 할 빈 서랍 같은 나날을

나는 서둘러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명선 시인 / 파본破本

 

 

빨간 스프레이가 담벼락을 X자로 그었어요

핏빛은 늘 불길해요 이곳은 결국 간이역이었죠

선로가 사라진 이곳, 어둠이 등에 뿌리를 내려요

잡동사니 퀴퀴한 냄새가 편안해요 엄마와 학교를 피해

숨던 침침한 책상 밑처럼,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듯, 창문에 돌을 던져요 파멸

음이 내 손목을 긋고 사라져요 나를 버린 가족을 향해 침을 뱉어요

골목을 걷어차던 발목이 다시 시큰거려요

 

나는 불온한 책, 세상은 끝까지 나를 읽어주지 않았죠

나를 한 장씩 찢어내던 산동네

내 것이 아닌 낯선 길들을 묻어버릴래요

포클레인이 길을 낸 산동네는 어둠의 울음만 키우지요

 

달빛에 말린 울음이 버석거려요

내 치부를 들춰본 저 밤을 받아먹으며 성장을 멈출래요

쪽수를 넘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난장판인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애초에 낙장落張으로 태어난 걸요

아직 할퀴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어요

 

 


 

 

오명선 시인 / 당신은 약관에 맞지 않습니다

 

 

들고 있던 커피 잔이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다

책상모서리와 계단이 내 무릎을 찧고 도망치는 순간,

어둠이 덮쳤다

 

그들의 입맛에 맞춰진 약관에

왜 미리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인지

눈이 침침해지는 것인지

 

오른쪽 눈의 실명

20년 무탈한 내 기록들의 항의에도 나의 내일은 부적합 판정

당신은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다섯 개 보험회사가 단번에 나를 뱉어버렸다

남은 왼쪽 눈마저 캄캄한 벼랑으로 굴렀다

 

먹통이 된 휴대폰처럼

고장 난 내가 약관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하나를 잃는다는 것, 짝을 채울 수 없는 통증이

오른쪽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제시한 나의 미래는 적신호

어디에도 나는 삭제되고 없었다

.

 


 

 

오명선 시인 / 해바라기

​수리공은 부재중

오지 않는 다음입니다

다음은 어림잡아 대충

어느 날입니다

달력에 쳐진 동그라미

비켜가는 것들은 기다림을 모릅니다

당길수록 멀어집니다

초인종은 잠이 깊고

느려터진 시곗바늘은 목을 키웁니다

길어진 목을 뒤틀어봅니다

짝사랑을 가꾸는 방식입니다

식어가는 식탁

창밖의 나뭇가지들 명랑합니다

곁가지의 생각을 잘라냅니다

초록 웃음을 액자에 담습니다

액자가 벽을 등집니다

등을 난발합니다

다음에 갈게요

난감한 표정

헐거워진 수도꼭지

누수가 커집니다

등의 폭력입니까

해바라기의 일기 피력하지 맙시다

 

 


 

 

오명선 시인 / 기억에 갇히다

 

 

집귀신이 된 여자

집을 벗어나면 숨을 쉴 수 없다

귀가 멍멍 눈앞이 캄캄하다

눈을 부릅뜬 차량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달려든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무기다

궁금한 집밖, 거듭되는 실패가 그녀를 집에 가두었다  

가장 안전한 곳, 집에만 있으면 모든 게 편안하다

그래서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두개의 예리한 안테나를 세우고

집안에서 바깥 세상에 초점을 맞춘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신문을 읽는다

 

집귀신이 붙은 여자

연애 한번 못해봤다

안방의 구들장과 한 몸을 이루었다

누가 볼세라 꼭꼭 닫은 문

하루 종일 집과 엉키어

전화벨 초인종소리에 깜짝깜짝 촉수를 세운다

어린 시절, 군에서 죽은 오빠가 일어선다

집에서 나가면 안돼

바깥은 모두가 지뢰밭이야

오빠는 어린 가슴에 뿌리박혀 자란 지병이다

그녀의 발을 꽁꽁 묶은 강박관념이다

그때부터 집은 그녀의 전부가 되었다

인터넷으로 은행 일을 보고 쇼핑을 하고 세상을 읽는 집이 신발을 끌어안고 잠을 잔다

 

그녀는 달팽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발을 자른다

 

 


 

오명선 시인

1965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 『오후를 견디는 법』. 2012년 인천문화재단문화예술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