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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밝은 시인 /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김밝은 시인 /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김밝은 시인 /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아릿하고 매운 하늘을 머리에 인

길이 멀미를 하듯 지나갑니다

 

직립의 시간 속

누구 하나 말 걸어오지 않는 날

 

몸은 늘 가로로 누우려 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흰 바람만 푹푹 쏟아집니다

 

허공으로 길을 내던 고광나무 곁을 지나

천지간 뭉클한 그대의 집,

가는 길은 멀어서

 

겨울을 걸어가는 홍방울새의

눈 속에 숨겨두었던

오래된 말들이 등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풍화되어가는 약속의 전언

나는 일찍이 입어본 일이 없는 납의 무게를 입고도

 

아직

그대를 기다립니다

 

—시집 『술의 미학』(지혜, 2017)

 

 


 

 

김밝은 시인 / 꽃들의 장례식

 

 

아가, 내 발등에 네 연약한 발을 얹어보렴 그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우린 함께 춤을 추는 거란다

엄마, 힙노스의 날개가 자꾸 저를 건드리는걸요

 

문을 열어젖힌 하늘이 쏟아붓는 폭언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노을을 잡아당기는 저녁의 몸짓에

불온한 생각쯤 말끔히 지울 수도 있었는데

 

태어날 때 쥐고 나왔을 생의 가벼움과 분홍이

아파요

 

명랑한 재잘거림이 무너져 밀실처럼 어두워지면

바다로 출렁이는 사람들의 질긴 거짓말을 품고

밀물이 되지 못한 속내가 질펀한 개펄처럼 드러나고요

 

시간의 옷깃을 부여잡은 손에

안간힘이 얹어질 때

바람의 기척 하나 없는 머리 위로

촘촘한 햇살을 쏟아붓던 하늘

작별의 인사처럼

미혹의 빗방울을 흩날리기 시작하네요

 

흔적을 빼앗겨 어긋나버린 신발들

비명을 토해내는 감정을 향해

 

이제 그만, 대답해주세요

 

-월간 <춤> 2023년 9월호 발표

 

 


 

 

김밝은 시인 / 꿈

 

 

간절한 것은,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을 것처럼

피를 토하듯

목숨을 가벼이 걸고

사랑해보는 일이었는데

 

가슴 한복판에 주-욱

붉은 금을 긋고 날카로운 손짓들

 

다만

꽃은 피었다 지고

잡은 손을 놓치고

 

잠깐,

바람이 머물다 가고...

 

얼굴 하나 또 멀어져간다

 

 


 

 

김밝은 시인 / 오래된 지붕위로 비가 내릴 때

 

 

잠시 비 그친 사이

안간힘을 다해 기다림을 절규하는 매미에게

친절하게 응답해 주고 싶어진 순간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노래 가사들이

오래된 지붕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 뺨을 때렸어야 했던,

아니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던 그날처럼...

 

혁명을 꿈꾸던 기차는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을 조용히 집어삼키며

어쩌면, 돌아오지 못한 오래전 순교자로 남겨지기를 기대하면서

남루해져가는 노래를 부르며 사라져 갈 것이다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사이를 빗방울이 눈치 없이 파고든다

 

새는 가야금소리처럼 튕겨 오르는 소리를 내지만

데리고 가지 못할 시간들을 이내 내려놓고 싶어질 것이다

 

매미들의 복부처럼 애달파지는 아침 8시,

세상의 모든 눈물의 색을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오래된 지붕 위에서 11월의 빗방울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리스의 데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하고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곡

 

 


 

 

김밝은 시인 / 이팝나무 아래서

 

 

저만치서 머뭇거리는 봄을 불러보려고

꼭 다물었던 입술을 뗐던 것인데

그만,

울컥 쏟아낸 이름

 

고소한 밥 냄새로 찾아오는 걸까

 

시간의 조각들이 꽃처럼 팡팡 터지면

기억을 뚫고 파고드는 할머니 목소리

악아, 내 새끼

밥은 묵고 댕기냐

 

 


 

 

김밝은 시인 / 옛날이란 이름을 가진

- 서도역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늙은 벚나무의 몸에 손을 얹으면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꽃을 피우고

경적에 실어 부지런히 올려 보내던 꽃소식이나

오후 세시의 꽃그늘 아래 다정한 이름을 부르던

우리도, 모두 오래전 소식일 뿐이라고

오늘은 조금 더 그렁그렁해진 벚나무 아래

길을 놓쳐버린 서도역, 그 쓸쓸한 얼굴 위에

 

봄이,

혼불 같은 치맛자락을 오래오래

깃발처럼 흔들고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역驛》2021년

 

 


 

 

김밝은 시인 / 푸른옷소매*

 

 

애끓는 눈물을 닦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적막을 끌어당겨야 할까요

 

오늘은 어깨위에 올려 놓은 사람을 내려놓고

내일은 함께 부른 노래들을 멀리 보내버리자고

그렇게 또 생각만 하다가

손으로만 만지작거리다가,

 

쉴 새 없이 자라는 생의 독침들을 잘라내려고

잠들어 있는 몸속 세포들을 흔들어 깨우며

오늘이라는 세상에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내일은 끝내 내 발 앞에 닿을 수 없는,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간절한 바람이어서

어제보다 더 짧아진 오늘을 살면서도

나무 위에 새들의 마음을 올려놓고 가만히 휘파람을 불다가

 

머리에 화관을 쓴 소녀들의 탱글탱글한 웃음소리에 힘이 나

푸른옷소매를 잡고 명랑하게 지냈습니다

 

짧은 하루가 졸린 눈을 감아도

가난한 사람들의 등불**을 매단 감나무는

오래오래 환할 것입니다

 

* 남원시 신동면에 있는 작은 미술관 이름, 그곳에 풀꽃 같은 화가가 산다.

** 윤효 시인의 시에서 변용.

 

-《열린시학》 2019. 겨울호

 

 


 

 

김밝은 시인 / 물고기 모양이었다가 새의 모양으로 바뀔 때

 

 

 신기하지, 구름은 어떻게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가 있을까 풍부한 표정들까지,

 

 구름의 흔적인 물방울 같은 이번 생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구름이 물고기 모양이었다가 새의 모양으로 바뀔 때, 그때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얼굴 모양을 한 구름은 기어이 보이지 않고, 숨어버린 당신 때문에 나는 다시 버림받은 느낌을 가진 먹구름 모양이 되겠지···

 

 구름 모양에 이름표라도 만들어 줄까 전생에 내가 싫어하는 파충류로 살았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뱀피 무늬를 한 구름이라도 보일까 전전긍긍하기도 하지 당신은 내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등을 다독여 주었는데, 어느 날 나를 흘깃거리며 지나가는 얼굴을 보니 오싹하더라

 

 오늘은 세상의 모든 종을 울려서라도 내가 원하는 구름 모양을 샅샅이 들

 여다보고 싶은 날인데 끝내 좁혀지지 않는 인연처럼 붉은 하늘은 구름을 밀어내려는지,

 앗, 이제 막 태어나는 저 구름 모양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문학과창작』 2023. 봄

 

 


 

김밝은 시인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예명: 김기옥. 한국방송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2013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시집 『술의 미학』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제3회 시예술아카데미상, 제11회 심호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