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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장욱 시인 / 이상한 나라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이장욱 시인 / 이상한 나라

이장욱 시인 /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이장욱 시인 / 실종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내 발이 지상을 떠나가는 풍경을

행인들은 관람하였다.

내 눈썹과 입술과 또 어깨가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실종 중일 때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누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햇살 속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렸다.

 

 


 

 

이장욱 시인 / 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낯선 입모양으로 지낸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일까요?

부디 당신의 영혼을 말해주십시오.

지붕은 새와 구름과 의문문

그리고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

 

나는 시체의 진심에 몰두할 때가 있다.

이상한 입모양을 하고 있다.

 

 


 

 

이장욱 시인 / 용서하기는 불가능

 

 

 당신은 대개 다정했고 희망이라는 단어를 알았으며 이웃을 위해 옳은 일을 했는데

 

 당신은 혼자 생각에 잠길 줄 알고 반성하는 말을 잘했으며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나갈 때마다

뒤에 오는 사람을 살폈는데

 

 당신이 나를 비난했어. 나는 쓰러졌네. 거의 사망했지. 내 시신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그건 당신도 아는 일.

 차가운 일. 복수의 일.

 

 나는 불경을 읽고 성경을 읽고 코란을 읽었는데

 오른뺨을 내밀고 왼뺨을 내밀었는데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외우고 반야심경에 대해서라면 하루 종일 토론을

 

 그래서일까? 당신을 용서하는 상상은 나에게 쾌감을 준다. 신은 죽었고 도스트엡스키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나는 용서의 칼을 갈며 노래 부르네.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아요. 비명을 지르지 말아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생각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고 반성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유리문이……

 이 봐요.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사소하다.

 

 나는 유리문을 열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누가 오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당신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드디어

 

 


 

 

이장욱 시인 / 電線들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通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上空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電線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이장욱 시인 /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새벽에 눈을 뜨면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느리게 건너오는 늙은 개의 이빨을 느낀다 나는 집을 나와 외곽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자의 눈빛이 안개 저 편에 깜빡이며 저물어간다 안개가 섬을 만든다 이것은 그리운 명제이다

 

 한 여자의 발자국이 안개의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나, 나는 한 여자의 발자국만을 따라 이곳에 왔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도대체 무엇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바게뜨 안에서 낯선 사내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멸종을 앞둔 마다가스카르 거북의 사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거북의 눈으로 안개가 내리는 녹천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냉소적인 미소였던가 여전히 안개는 섬을 만든다 섬은 그러므로 존재한다

 

 외로운 이빨은 그렇게 빛나는 것이다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너간 늙은 개가 안개 너머 먼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그 끝의 해안에서, 이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개는 섬을 만든다

 

 


 

 

이장욱 시인 / 초점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갔다

 

겨울의 깊이가 맞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각종 세금을 내고

신문을 읽고

거짓말을 했다.

조금씩 너를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너의 끝까지

닿으려고도

 

나는 명료하게 살아갔는데

거울 속의 내가 어딘지 흐릿하였다.

말을 했는데 또

하려던 말과 조금 달랐다.

액수가 맞지 않고

기사마다 오탈자가 있었다.

 

그것들이 아주 흡사해서

나는 원숭이의 길고 아름다운 팔을 쭉 뻗어서

저기 저 어둠이 아닌 것을!

움켜쥐었다.

 

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안경을 바꾸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더 깊은 곳에서 누가 그것을

살아갔다.

 

 


 

 

이장욱 시인 /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장욱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노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4년 《현대문학》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등, 평론집 『혁명과 모더니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 수상. 현재 〈천몽〉 동인.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