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현주 시인 / 알바트로스의 사생활
하루에도 열두 번 날개를 잘랐다 가마솥 흙 틈으로 새어든 지붕은 안개꽃만 피워냈다
콧수염 돋은 군인이 최전방으로 가고 딱 한번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조차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아무리 돌아봐도 돌아오는 건 먼지뿐 열여덟 나이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에 둥지를 튼 그녀,
기우뚱, 나뭇짐은 초속으로 쏠렸다 큰 지게가 중심을 잃고 새끼에게 착지할 때마다불안하게 깨진 무르팍
날개를 꺾어 태우고 사랑채에 몸져누운 시모의 등을 데우자외양간 소가 배불렀다
날개에 박인 굳은살이 땅을 짚어도 보릿고개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가장 멀리 나는 새 내 어머니는 신천옹 이었다
양현주 시인 / 보고 싶습니다
그대가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암처럼 뇌 세포에 침투한 그리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대의 따스한 눈빛 아찔한 현기증일어
차마 못보고 쓰러질 것 같은데 초마다 서성이는 부르튼 기다림
오늘만 딱 오늘만 그리워하자 새롭게 다짐해 보아도
사랑을 굽는 가마 속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뜨거운 목마름에 눈물 글썽이는 하루가 석류처럼 익어가고 있습니다
양현주 시인 / 그대 가슴에 닿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는 내 안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꽃 등잔 나무에 걸어두고 가는 길마다 비추고 있습니다 사랑도 미움도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합니다
얼마나 깊이 빗장을 걸어 잠 그어야 바람이 불지 않을는지 그대처럼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이고 싶어 새벽이면 틈난 구멍위에 붉은 벽돌 하나 올려놓습니다
그대의 곧은 법아래서 달빛 감돌아 흐르는 저 피리소리 그리운 이여 흔들리지만 꽃잎으로 떨어져 그대 가슴에 닿을 수 없습니다
투명한 울림에 벌거벗은 영혼만 울고 있습니다
양현주 시인 / 부재중
손과 손이 마주친 순간, 체온은 낯익은 고기압이 된다
상냥한 표정을 가진 살결에서 말없이 번져나가는 상서로운 기운
저기, 왼편만 있는 사람이 가파른 산마루 오르고 있다
황망히 강물을 건너 숲으로 뛰어간 오른편이 비너스를 붙잡고 간호한다
땅속에 팔을 심어놓은 아프로디테가 눈물을 뿌려주는 숲 덩굴 어깨가 면벽을 주무른다
착한 수지침 하나가 슬며시 나무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와 애끓는 마음을 찌른다
성치 못한 몸이라도 괜찮다 바람이 허공을 훑으며 손사래를 친다
삐딱한 세상, 정면을 보란 듯이 가문비 우는 소리가 집 밖으로 껍질을 내민다
숲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하냥 웃는데 스친 온기를 잊지 못한 지금
내 푸른 눈이 아리다
양현주 시인 / 거기 있어줄래요
영등포역이 혼자 웃어요. 블라우스에 체육복 입은 열차가 달려요.묻지 않아도 변명하고 싶은 때가 있지요.생각이 물구나무서기도 해요.진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말의 뒤편에서 왔어요.거꾸로 사람을 읽은 적 있지요.
플랫폼에 동행한 구두를 두고 타거나 아차산역을 아차 하는 일은 풋사랑처럼 반복되지요.생생한 기억부터 말아야 생각이 맛있어요.아픔도 자꾸 입으로 불면 단내가 나지요.의구심을 입에 넣어보면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닿아요.말이 외곽으로 천막을 쳐요.혓바닥에 가뭄이 들어요.
불씨도 골든타임이 있어요.앞 페이지 내용이 쓸쓸한 좌석은 비어있어요.당신을 잊기 전에 책을 읽을까요.불을 중간쯤 읽으면 금방 어두워져요.울던 주름치마도 조신하게 웃어요.쥐락펴락 주름잡던 젊음은 졸다가 오류역에서 내렸지요.
한때 뜨겁던 방화역과 수색역 사이 섣부른 판단이 멈춰있어요. 집 없는 바퀴처럼 천 번의 밤과 낮이 레일 밖에서 빨간 푯말로 굴렀어요.마지막 하루는 나를 잃어버린 상봉역으로 가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영화 당신,거기 있어줄래요
양현주 시인 / 시간 이동
밤 열두 시다 두 시를 넘어야 나는 비로소 나에게로 옮겨지는데
머리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아득한 초자아 빛이 없는 물 위에 닿아야 안개가 풀어놓은 프로이트를 이해할 수 있다
계단을 밟고 끝까지 올라간 정점에서 편백나무 베개를 먹고 자란 반성이 말을 걸었다 몸의 피톤치드는 지우개야 상처 많은 시공간(時空間)은 지워줄게 깊이 잠들게 놓아줄게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가 쏟아낸 말이 더부룩해 무의식을 부화하는 그 시각 하루를 되새김질하느라 무거운 귓바퀴는 회전 중이다
매번 준비하고 떠나는 여행은 없다 미처 들지 못한 젖은 불면이 있을 뿐
네 꿈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양현주 시인 / 마트료시카(Matryoshka) -엄마 인형
붉은 립스틱을 몰고 다니는 시월의 속내가 궁금해요 붙박이 웃음을 달고 있는 둥근 목각 인형을 돌리면 겹겹이 쌓인 엄마가 열려요
내가 왼쪽으로 웃음을 들면 같은 항렬의 계절이 똑같은 표정을 달고 나올 테지요
치매 초기인 밖은 떨어진 바닥을 깁는데 하얀 머리를 돌려 뚜껑을 열면 엄마는 젊어집니다 잊고 싶은 것만 잊는 편리는 서쪽으로 보내요
엄마를 보며 내 안의 모든 것이 울었지만 괜찮아요,
고장 난 시간은 자꾸 혼자 돌아요 바람 빠진 홀쭉한 뱃속으로 나를 들여보내 주세요
기억이 차곡하게 들어찬 집 문손잡이 무늬처럼 나를 만져주세요 엄마의 엄마가 튀어나와요
웃고 있는 시월 속에 또 시월이 있어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민 시인 / 최후를 기르는 방법 외 7편 (0) | 2025.12.08 |
|---|---|
| 이장욱 시인 / 이상한 나라 외 7편 (0) | 2025.12.07 |
| 강인한 시인 / 물 먹는 사람 외 6편 (0) | 2025.12.07 |
| 박진형 시인 / 외로움의 반대말 외 6편 (0) | 2025.12.07 |
| 차주일 시인 / 한순간이라는 생물 외 6편 (0)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