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민 시인 / 최후를 기르는 방법
푸른 환자복을 입은 유령들이 링거를 꽂고 복도를 걸어 다닙니다
복도가 점점 길어집니다
하루 더 금식 할까요 한 번 더 죽게
나는 죽은 너의 유령 너는 죽은 나의 유령
그만 죽어줄까 이제 그만 죽여줄까
기도합니다 기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시체가 쓴 문장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 흰 색이 마르면 덧칠합니다
-《서정과현실》 2017. 하반기호
조민 시인 / 시트콤
누가 내 머리에 찍어 놓고 갔을까? 검은 새 발자국 내가 왜 거기 또 죽어 있었을까? 밥솥만 열면 흰 쌀밥 위에 흰 새 발자국 내가 다시 태어났을까? 나만 모르게
조민 시인 / 우리가 정박아였을 때
노란 중앙선을 타고 역주행 했었지 닭똥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엄마의 세 번째 결혼식에 갔었지
우리가 정박아였을 때
우리는 닭장에서 살았지 닭처럼 정수리를 쪼아대는 할머니가 검은 알을 낳고 또 낳을 때까지
우리만 혼자 정박아였을 때
서로 따귀를 때리면서 생각을 손바닥으로 하는 연습을 했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벌레가 된다잖아
우리가 정박아였을 때
진짜 우리가 정박아였을 때 우리가 엄마의 눈알을 쪼는 흰 닭이었을 때 우리가 엄마의 검은 탯줄이었을 때
조민 시인 / 파프리카
파프리카를 깨물면 아프리카 냄새가 난다 파.프.리.카. 파.프.리.카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파 프 리 카 한쪽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며, 아 프 리 카
파프리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새가 살고 있을까 파랑새가 주렁주렁 거꾸로 매달려 노래 부른다 파 카 프 리 리 프 카 아 아, 파란모자 파파게나가 피리 불며 새장에서 나온다 파.랑.새.는.다.죽.였.어. 파란 파파게나 눈에서 파란 피가 흐른다 파.프.리.카! 파.프.리.카!
파프리카 안에서 파란피 뚝뚝 흘리는 파랑새 한 마리
조민 시인 / 조용한 회화 가족 No. 1
오늘 가족은 스미스입니다 방금 분양받았죠 오전의 대화는 이름 부르기와 가족 소개입니다 10페이지에는 비가 오고 다음 페이지부터는 계절이 바뀝니다 난치병도 범죄도 전쟁도 없는 동네입니다
가공인물인지 실제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장만 그대로 발음하고 사실만 그대로 읽어 주면 시간은 잘 가거든요 배경과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비인칭입니다 아프거나 새로 태어나면 다시 편집하세요
이것은 하우스입니까 일주일은 칠 일입니까 오늘은 다시 오늘입니까 그는 형이기도 동생이기도 합니까 금요일마다 파티를 합니까 왼쪽으로 두 블록을 지나면 단원이 바뀝니까 겨울에도 눈이 옵니까 굿 나잇 굿 타임
이곳은 비즈니스도 모험도 다 안전합니다 모두가 다 가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요 페이지마다 크게 외치고 껴안고 소곤거리지만요 사실은 아무도 듣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못하지요 시즌 특별 부록이지요
조민 시인 / 포스트휴먼
지하 물탱크를 핏물로 가득 채우고
눈이 녹은 자리에서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되는 기쁨
사람이니까 너무 쉽고
사랑은 내장에 붙은 고래회충처럼 길고도 아름답지만
사랑은 사랑을 죽이고
사람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질문 같은 첫눈이 비무장으로 내리고
코란 속 죽음과 죽음을 죄다 베끼고 흉내 내면
죄를 사하여 줄게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여리고 따뜻한 사람을 제일 먼저 죽이는 시놉시스를 읽는다
생일 축하해
열에 열은 살고 열에 열은 죽는
여긴, 너무 많은 입을 쓴다
-『작가와사회』 2022년 하반기 발표
조민 시인 / 히히(飛飛)
거꾸로 걸어다닌다 머리채를 쑥 뽑으면 비명을 지르고 비둘기처럼 히히히 운다 이 비명은 듣기만 해도 검은 피를 토한다 행인을 보면 반갑다고 손뼉을 친다 깨깨깨 웃는다 윗입술을 뒤집어 올려서 눈을 덮어버린다 이 때 입술과 눈을 꼬챙이로 꿰면 생포할 수 있다 뒤통수에 큰 입이 있는데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닌다 사실 눈인지 입인지 자신도 모른다 정수리가 움푹 파여 있다 늘 침이 고여 있다 이 침이 마르면 바로 죽는다 비가 오면 지나가는 사람을 검은 빗방울로 발목을 친친 감아서 넘어뜨린다 지붕 위에 묶어 놓는다 나무 위에 묶어 놓는다 빗줄기 속에서 빗방울 속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히히비비 웃는다 히히비비 운다
*히히(飛飛)-요괴
<서정과현실》2013. 하반기호
조민 시인 / 201편
형이 우리를 낳고 우리는 동생을 낳아서 우린 모두 예수가 됐지 한참 동안 마주 보며 낄낄거렸고 아파했고 기뻐했지 달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지 물밑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을 때까지 모래 밑에 숨고 물풀 뒤에 숨어서 꽃게도 잡고 해파리도 뒤집어썼지 어떤 생각은 머리고 어떤 생각은 지느러미였지 처음 보는 것마다 이름도 지어 주고 리본도 달아 주고 등에 꽂힌 비늘마다 알록달록 색칠을 했지 너는 먼로, 너는 모하메드, 너는 말코비치, 너는 아난다 오전은 돼지였다가 오후엔 닭으로 바뀌는 너를 벽에 걸어 두고 절을 했지 성호도 그었지 우리가 너희들의 발밑에서 거대한 빙하로 녹고 있을 때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서진 시인 / 행간의 고요 외 6편 (0) | 2025.12.08 |
|---|---|
| 김홍성 시인 / 그대 머무는 세상 외 6편 (0) | 2025.12.08 |
| 이장욱 시인 / 이상한 나라 외 7편 (0) | 2025.12.07 |
| 양현주 시인 / 알바트로스의 사생활 외 6편 (0) | 2025.12.07 |
| 강인한 시인 / 물 먹는 사람 외 6편 (0)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