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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용 시인 / 유리병의 세계
거친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어 슬픔을 모르는 세계에서 슬픔이 모르는 세계로 우리는 자주 돌아오지 못해서 항상 거기서 시작했지 표면이 말랑말랑해진 밤하늘 안개라도 일어나면 금세 깨어져 피 흘릴 것 같은 잠 그러나 그건 눈의 일이었어 먼 곳을 보며 출렁이다 흘러내리는 일 박힌 못을 빼내듯 눈물이 쏟아졌지 유리병이 고집하는 색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웅얼거리던 산책로를 닮았고 병의 식도를 따라 안으로 투명한 자갈이 깔려 있었어 안과 밖의 경계가 있다면 벗겨진 신발에서 자란 토마토라고 할 거야 조금 더 들어가면 작은 정원이 있고 풀밭 위의 오두막 나른한 안락의자와 하얀 책상 나뭇잎 펜으로 나는 쓴다 한 번도 감정을 누설해 본 적 없는 어깨는 망령이라고 죽음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 같다고 가장 사적인 공간이란 얼마나 치밀한 비현실인지 세상의 모든 빈자리에 당신이 있었어 정원에는 정원이 없어서 쓸쓸하지만 환영이라는 인체에는 취한 영혼이라도 부어 넣고 싶었어 내가 이대로 어딘가에 도착한 기별이라면 유리병 속 정원은 방금 자른 머리카락 뒤에 숨은 귀였다고 기억할게 파울 클레의 화면에 참여하지 않은 곡선들처럼 눈부시도록 휘어진 해변 정밀 묘사한 하반신 드로잉에 흑백의 상반신 사진 이미지를 붙이면 따뜻한 스웨터가 될까 쓰라린 사랑으로 남을까 젖은 모래 위에서 손가락을 구부려보았어 연필을 쥔 자세로
김관용 시인 / 종려나무 아래서 ㅡ마그리트의 몽타주와 깃털들
법력이 없는 사람이 천공을 받으면 축생으로 태어난다는데,
새벽에 내린 폭설보다 사제의 검은 옷을 존중한다 여러 명의 화자와 심사숙고한 동선들 마주보는 두 대의 차가 있다 그들이 속도라면 잠시 후 부서질 것이다
시계탑을 돌아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쌍의 남녀가 있다 금기를 깬 그들은 세 들어 살던 마음에서 쫓겨나 몸이 되었다 그들이 사랑이라면 아직 열지 않은 매장의 포스터만큼 슬퍼 보이겠지
며칠 전에도 그들은 모자를 쓴 채 차 안에 있었다 운전석 쪽에서의 환한 움직임을 느리고 우아한 음악이라고만 이해했다 부다페스트를 발음하던 그들의 얇고 가벼운 몸은 연기를 피우며 다시 길을 잃을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나는 영원하다는데,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된 이들의 에세이를 절망과 상실을 그린 이야기라고 읽었다 어제는 느닷없이 당신에게 질주하는 빛과 사라져야 비로소 빌어주는 명복 사이에서 괴로웠다
머릿속에서 자라난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식당이 있다 저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로 옮겨 가려나 참혹한 침묵을 물어뜯은 개처럼 낯설다는 말의 위선을 상상한다
떠난 자의 물가에서 나지막이 떠오르는 흐릿한 영상들 혹은 낡고 오래된 극장들 나는 잠시 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너무나 순종적인 까닭에 우리는 내내 이생에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법에 즉하여 세간을 포섭하는 분한을 밝히려 하나니,
낙관주의자의 태도로 나는 고요히 잠들어 있는데 손가락 관절마다 뚝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김관용 시인 / 선수들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201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김관용 시인 / 우리에게 이해의 순간을, John!
지난번 만났던 여자와 헤어지기로 했어 입술에 묻은 오문 때문에 밤이 느려진다 John의 악몽처럼. 느리고 낯선 대답들이 지하창고로 모이면 편의점 유리문 안에서는 단순한 이미지가 반복되었어 망치가 필요했을까 사랑은 서대문에서 불던 바람처럼, 아니 바람으로 몸을 비벼대는 회화나무처럼 메마르게 웃었어 누군가의 말을 기억하려, 혹시 트럭에서 끄집어 내린 자신의 머리뼈였는지 모르지, 아픈 그림자는 태양의 반대편에서 필사적이었어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John의 엄마와 엄마의 자장가 고민하던 문장은 창을 벗어나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지 삐걱거리던 몇 개의 못자국이 난문으로 뽑히고 마지막 나뭇잎은 헤어질 때의 필체처럼 떨어진다 지네를 연상해 보는 거야 심연으로 뿌리내려 본 나무일수록 쉽게 지쳤어 사랑은 서대문에서 충무로로 불던 바람처럼, 아니 그 바람으로 몸을 비벼대던 한 쌍의 회화나무처럼 메마르다 여자의 어깨에서 속옷이 흘러내렸지만 결국 남긴 밥을 바라보듯 아주 미안해졌지 괴물이 나올 것 같은 복도 끝에서 퇴물이 된 보컬은 순식간에 망가졌어 플라스틱 병에서 시약이 쏟아진다 감정은 낡고 희망의 이미지는 서툴렀으니 모호한 것에 눈이 쏠리는 것에 감사해
John은 백야를 울고 있는 순록, 이해할 수 없이 느린 영역이야, 후회하지 않으려고 엄마.
생생하게 반복되는 비극일수록 이해하기 편했어 팔베개를 하고 귀신으로 살다가듯 무성했고 서툴렀으니.
김관용 시인 / 엑스트라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고민한다 헬멧을 쓴 태양이 이동한다 두개골은 탄로난다 꿈을 꾸듯 매번 편백나무 앞에서 길이 비뀐다
이어폰을 따라 송출되는 악보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들
시장 한복판, 빙판 위의 스쿠터가 발끝으로 매복한다 당분간 바닥만 생각하기로 한다 정지를 준비하는 동안 담장이 필요하다 약간의 문신을 팔뚝에 묶어 둔다
핀란드 껌을 씹으며 핀란드만 생각하고, 우체국은 우체국이 아닌 것만 배달하는
횡단보도에 어울리는 그림이 되기 위하여 기다림에 익숙해진다 입간판의 일은 최선을 다해 부인하는 것 백화점보다 좋은 물건을 백화점보다 싸게 파는, 말하자면 그는 늘 신상품이다 훌륭한 배경이다
지도에도 없는 바람이 전단지에 싸인다 가판 위에서 덜그럭거리는 뼈마디들
문득 누군가의 기일처럼 무거운 눈빛이 한참 서 있다 간다 동전 속에는 언덕의 잔뿌리가 계단까지 뻗는다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웃는다
렌즈에 잡힌 맹수처럼 포효하듯 절정에 오른 확성기 쑤욱, 커다란 손 하나 점퍼 속으로 들어온다
김관용 시인 / 저녁의 열쇠공
치열이 고르지 못한 퇴근 길 눈 녹은 먼 산처럼 그는 듬성듬성 웃는다 느티나무가 그려진 벽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전자회로가 가득한 밤 더러는 열 수 없는 문도 있는 것이다 한때는 지평선이라도 열 것 같았지 그런데 왜 모든 손잡이는 이별을 상징하는지 만능 키 같은 대답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해 겨울 아내와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손끝의 감각이 무뎌질 무렵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아이들이 따라 왔다 바큇살에 잘려지는 아이들의 그림자엔 녹말가루 같은 게 묻어 있다 그는 늘 아내가 뜨개질한 스웨터를 입는다 온몸을 돌다 나온 정맥이 붉은 실밥으로 뜯어지도록 열쇠 구멍에서만 바로 보이는 세상 그녀 몸에서 자라던 그를 닮은 시간도 캄캄하게 연결되던 허공도 놓고 싶지 않은 주소들을 만지작거렸다 재작년 묻은 아내는 어떤 입구가 되어 있을까 좁은 곳을 들여다볼 때 마음은 납작해진다 덜컥, 망치로 두꺼운 밤하늘을 두드려 본다 설혹 다친 바람이 망설이게 만들더라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쇠붙이들을 모아 연을 만든다 어깨에 꼬리를 매단 쇠붙이들이 붉은 정맥을 물고 달아난다 순수한 곡선이 되어서야 입구와 출구는 맞물리고 부서져야 열리는 바람의 굽은 뼈들 누군가 두드리고 간 밤이면 잠을 설쳤다
김관용 시인 / 정동진
누군가 찾아왔다 오른손을 올리고 왼쪽 다리를 약간 구부린 채로 늦은 산책이 빠져나갔다 우린 과정이었으므로 태어나기 이전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일출이 있었고 일출은 화산이 만들어낸 고요한 섬이었다
모래를 쌓다 보니 발코니가 보였다 수백 개나 되는 뼈에서 빗물이 빠져나간 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텅 빈 위장을 물로 채운 짐승처럼 1월 1일은 느리게 지나갔다 술집에서는 아픈 데 없느냐고 물어주길 기다리다가
아주 어렵지 않게 욕설이 태어났다 화가 치민 철길 위에서 모래가 된 것 같다 모래의 문장엔 귀신들이 우글거린다 바람이 솟구치던 기암절벽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넘어졌다 나의 몸엔 주저앉은 밤거리들이 우글거린다 우산을 잃어버린 저녁
나는 내가 비 내리는 창문이란 기억에 있다 우리는 정동진을 소비하지만 곧 그의 멸종 앞에서 고딕으로 말라갈 것이다 누군가 찾아왔다 언덕 위로 배가 오르고 있다 백사장에서 요철이 느껴졌고
잠든 이들의 냄새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김관용 시인 / 불안한 낙서 도시질감 아론 시스킨드
얼어붙은 걸 보니 저것은 피의 책이 맞습니다 한밤중에 또 눈을 떴습니다 누군가의 소리를 받아 적다 보면 무엇을 적은 건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면의 풍경이니까요 혼자 있으려니 무너지는 걸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모아보면 내가 됩니다 당분간이겠지요 혼자라는 건 마법이니까 불안해질 수 있는 거니까 불안한 날들을 연기하는 겁니다 가지마다 수액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의 태몽 한숨을 뱉고 한숨을 마시고 숨이 차서 공사장 철문을 녹아내리는 녹물 행복에 겨운 시간 닫혀 있는 시간 보이지도 않는 태양이 끈적하게 흐릅니다 그건 아직 마르지 않는 물감이지요 붓으로 묻힌 영혼입니다 이마를 만져봅니다 순수라는 말이 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혀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은 그대로 혀와 함께 허공입니다 발음된 적 없으니까요 황량하고 고즈넉한 눈빛과 참담한 심장을 가진 음악이 걸어갑니다 얼마쯤 걸어가다 이쪽을 돌아봅니다 눈치를 보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당신과 나의 경계가 생기는 일이지요 왼발과 오른발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눈 덮인 나의 인가는 얼마나 더 오래 당신에게 가는 길이 되려는지 한숨이 붉습니다 몽환적인 숲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겨누는 것입니까 무너질 자격이 충분합니다 세상에 없지만 들은 대로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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