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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시인 / 안방 몽유록*
나는 지붕 위에서 그네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이 산과 저 산으로 버드나무처럼 휘어졌다 몇은 매달린 줄도 없이 마을보다 큰 꽃 속으로 들어왔다 나오곤 했다
세상은 붉은 목단 한 송이였고 마을은 점점 소실점 끝으로 멀어져 갔다
목단 나무줄기를 따라 강물이 흘렀다 강물을 따라 구름이 흐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노을처럼 퍼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높은 계단으로 밀려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눈물이 자라는 것처럼 아래로부터 강물이 흘러 올라왔다
그네를 타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꽃피던 마을도 지나갔고 목단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람 그러니까 잠깐 공원을 걸어가는 사람 모자를 들치고 지나간 개미 혹은 모자 속에서 자라는 자두나무
그런 후에도 계속 멀어지는 사람 말을 잃고 자라는 버드나무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란을 지나 걸어가는 사람
*조선시대 신광한의 가전체 소설 제목 변용
이승희 시인 / 물방울
물방울은 왜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맺혀지는 것일까? 맺힌다는 그 말 속 들어 있는 단단한 뼈 같은 마디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하나의 맺힘이 있기까지 그 오랜 습기의 기억들은 어느 바람 속, 어느 쏠쏠한 저녁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일까. 얼마나 사무쳤기에 저리도 둥글어진 것이냐. 물방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사랑은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만나는 것처럼 그런 것이어야 한다.
-시집 <저녁을 굶은달을 본 적이 있다>에서
이승희 시인 /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
배추흰나비가 내게 날아오는 것 같았다 어떤 계단을 오래도록 지나 둥근 사과 속으로 잠들러 가자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만 죽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전구처럼 켜지는 것이어서 악몽이면 어떠랴 싶은데 매번 같은 꿈을 꾸고 난 사람처럼 잎사귀에 붙어 잠을 잤다 넘치는 얼룩 사이로 모자라는 얼룩처럼
물속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소리들이 아무 뜻 없이 이 방과 저 방 사이로 옮겨지는 게 좋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다 살 수 없을 것 같은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책상 위의 사물들은 다 조금씩 떠 있다 그게 원래의 자리라는 듯이 잠겨 있는 것이어서 살고 죽는 일이 딱 지금과 같은 것이려나 싶은데 물속에 내리는 폭설처럼 수없이 많은 배추흰나비가 한없이 느린 속도로 소리가 되고 있었다 그런 말이었구나
너는 오는 게 아니라 생겨나는 거니까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잘 살았다는 말 이 집엔 그런 것들이 살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이제 다시 여름은 오지 않겠지 가버린 것들은 다시 오지 않아야 한다 거기서 누군가는 또 길을 잃을 것이고 어긋나려고 아름다워지겠지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매일 단체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이승희 시인 / 밤배
잠의 뒤꼍으로 꽃이 피듯 배가 밀려왔다 나의 등을 가만히 밀어왔다 죽은 이의 편지 같아서 슬프고 따뜻해서 그렇게 배에 올랐다 배는 공중에 떠서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처럼 흘러갔다 눈이 내리듯 천천히 흘렀다 가는 것이 꼭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2023.07.06
이승희 시인 / 밤은 정말 거대하고 큰 새가 맞는다네
나는 날마다 접혔다 펴진다 조금씩 늘어났다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잠시 살았다가 또 잠시 죽었다가 하였다. 괜찮았다 거대하고 큰 새는 날마다 나를 낯선 곳에 두고 날아갔다 날마다 조금씩 늦게 왔고 조금씩 빨리 갔다 그것도 좋았다
새의 깃털마다 마을이 하나씩 들어 있다. 뼈를 구부려 지은 집마다 불이 켜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골목하다 환한 피가 흐르던 우리는 야행성이었다 새의 종족 날개뼈를 숨기고 태어난다
나는 밤이 숨겨둔 무수한 새를 본다 별을 가두고 있는 별처럼 날마다 흩어지고 멀어지며 우리는 같이 잠들고 같이 죽는다
새는 새로 이루어져 있고 새는 새로 갈라져 있다. 새가 죽으면 새가 태어나는 밤 죽은 새는 발견되는 일이 없다. 건축되는 새 혹은 밤
손가락을 물어뜯으면 무수한 새가 흘러나왔다
이승희 시인 / 복도의 마음
창밖으로 물고기 한 마리 스윽 지나간다
어디가?
복도 끝으로 여름이 온다는 말이 좋았다 여름이 와서 나를 데려갈 거라는 말이 좋았다
끝이 끝을 바라볼 때 복도는 완성된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완성되고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해서 완성된다 복도와 복도가 나란히 걷거나 간신히 비켜갈 때
아이들은 창문에 붙어서 물풀처럼 느리게 흔들리는 여름을 기다리고 제 그림자를 똑똑 분지르거나 가는 다리로 서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물가로만 걷는 습성처럼 뭘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서 쏟아진 우유처럼 울고 싶은 마음들만 자라고 상처와 불행처럼 가까운 게 또 있을까
뭘 해도 다치는 마음처럼 밤이 오고
큰 배 한 척이 복도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어디론가 흘러가곤 했다
이승희 시인 /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
늙은 할머니 앞에서 느리게 걷고 있는 늙은 개 할머니가 멈추고 줄의 곡선이 펴지기도 전에 늙은 개는 멈춰 선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것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처럼 할머니가 걸음을 떼자 늙은 개는 동시에 걷기 시작한다 둘은 그렇게 끝까지 곡선이다 왼발은 왼발 오른발은 오른발 구름을 밟고 물위를 걷듯 나는 조용히 구령을 붙여본다 오늘은 참 많은 별이 뜨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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