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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시인 / 세작을 우리는 시간
펄펄 끓는 물은 쓴맛을 내기 때문에 팔십 도 정도 식혔다가 우려 마시면 은은한 맛이 난대요.
불을 켜 놓고 미이라처럼 잠들어 있었던가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찻집의 처녀가 불혹 가까운 나에게 뜨거운 물을 붓는다 몸 속에 쌓인 시간들이 빳빳하게 일어선다 언제였던가, 아침 안개에 이끌려 거품 같은 꿈을 햇빛에게 내보인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꿈을 벗어나 버린 길의 아름답게 혹은 쓸쓸하게 구부러진 뒷모습이 얼핏 비치고 몸을 말리던 바람의 여운이 깔리고 내 삶을 지켜보던 구름의 그림자들이 웅성거린다 우려낼수록 녹차의 맛은 적막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물의 힘에 뿌리내린 풀들은 그래그래 알 수 없는 곳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아득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시간
정용기 시인 / 공갈빵
터키 앙카라의 어느 2층 식당 단체 여행객의 점심으로 나온 공갈빵
돈과 욕망과 아집에 빠져 알맹이 없이 부풀린 내 삶을 먼 이국에서 만난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남는다
-시집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에서
정용기 시인 / 산란
혼인 비행을 끝낸 잠자리들 떼를 지어 냇물에 알을 낳는다 먹물 적시는 붓처럼 꽁무니를 퐁당거린다 물 속의 푸른 하늘에 온몸으로 경전을 새기고 있다 유서를 쓰고 있다
부디부디 살아서 돌아오너라 알과 애벌레와 탈바꿈의 머나먼 시간을 지나 길 잃지 말고 반드시 살아 돌아오너라 그래서 그 머나먼 여정의 스산함과 갈랫길마다 서성거리고 구부러지던 마음을 날개가 투명하게 기억하게 하라
저 붓질이 가르치는 머나먼 길 잠자리들이 온몸으로 꾹꾹 눌러쓰는 전서체의 유서를 읽으며 깊은 가을을 건넌다
-『현대시』 2003년 8월호
정용기 시인 / 재봉틀
햇빛 쉬 들지 않는 家系 그래도 물색없이 꽃은 피고지고 염치없이 나뭇가지는 무성하게 돋아나고 그늘은 마음으로 다 받아내었습니다. 만산홍엽 잠재우고 뻗치는 산자락 다독거리느라 누더기가 되어 어느새 겨울이 되고 동지섣달 밤도 깊어
재봉틀 돌리는 어머니 발치에 쌀 쏟아지는 소리 자욱하게 쌓였습니다. 어머니 슬하에 눈발들 자자하게 몰려들었습니다. 동지섣달 문풍지도 귀 기울이며 밤을 지켰습니다.
다음 날 새벽 눈발 위에 두 줄로 난 노루발자국 하늘로 이어지고 노루발자국 어머니가 배고픈 길짐승을 불렀던가 봅니다
- 『시와 표현』 2012년 가을호
정용기 시인 / 도화역과 도원역 사이
환승역에서는 늘 허둥대고 낯선 역이 지나갈 때마다 마음은 한 칸씩 졸아든다. 종착역 가까운 곳 도화역과 도원역 사이에 제물포역이 있고 경주 이씨 상가를 가려고 제물포역을 빠져나오면 내려본 적 없는 도화역이 자꾸 눈에 어린다. 무심코 지나온 낯선 도시의 무수한 불빛들 내 안에서 만발하여 한 시절 흘러간 곳 그곳이 도화역이었으려나. 꽁무니만 보인 채 멀어져 간 전철이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먼바다 어디쯤에서 힘겹게 끌고 온 불빛 풀어 놓고 한바탕 꽃 천지를 이루는 곳 그곳이 도원역일라나.
문상객의 발길을 밝히는 조등이 잘 무르익은 복숭아꽃이로다. 경주 이씨 영정에 언뜻언뜻 밑그림으로 깔려 있는 지나간 봄 풍경이 마음을 쑤신다.
정용기 시인 / 조종사
이순이 되었지만 나는 조종사가 되어 어느 날 한 두 번쯤 비행기를 몰 것이다 서른을 넘긴 딸내미가 혹 소나무 같은 배필을 만나 혼례식을 끝내고 머나먼 남태평양 섬나라로 신혼여행을 떠날 때, 태풍을 만나지는 않을까 난기류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폭탄을 몸에 두른 테러범이 타지는 않을까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잘못 들지는 않을까 세계지도를 펄쳐 놓고 밤새 걱정을 하다 말고 꿈속에서 직접 비행기를 몰고 남태평양을 건너서 야자수 즐비한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시킬 것이다 딸의 여권에 자그만 섬나라의 관리들이 입국 도장을 찍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 4박5일쯤 기다렸다 다시 태우고 올 것이다 눈 아래로 제주도가 지나가고 고군산열도가 왼쪽으로 펼쳐지면 고도를 낮추면서 랜딩기어를 내리고 살짝만 놀라게 활주로에 기체를 덜컹 내려놓을 것이다 비행기 한 두번 이착륙하는 것쯤이야 1종 보통 운전면허증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시집 <주점 타클라마칸> 2022
정용기 시인 / 가로등 비망록
오늘 밤에도 길을 나서지 못했다. 노선버스 끊어진 한밤중에도 우두커니 서서 여전히 텅빈 거리를 지킨다. 자주 무릎이 저리고 들쑤신다. 밤새도록 바닥을 비추어도 발은 시리기만 하다. 스스로 비춘 빛으로만 목숨을 이어 가야 하는 숙명이 나에게만 주어졌다면 벌써 떠나거나 주저앉았을 것이다. 이 거리의 이력을 다 꿰고 있는데 원뿔의 불빛 속으로 다급하게 뛰어드는 저 눈발들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꽃집 간판이 부동산으로 바뀌었고 세탁소는 세간을 다 들어내어 텅 비었고 꼭두새벽에 문을 여는 떡집은 고단하고 폐업한 중국집 주인은 소식을 알 수 없고 닭발집 주인 혼자 지키는 날들이 늘어나고,
여차저차 어둠 속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면서 겨우살이를 하는 사연들을 잠시 기웃거리다 가는 그믐달은 알기나 하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십자가가 헤아리기나 하랴.
때때로 아랫도리가 사라지기도 하는 밤안개 차갑게 차오르는 밤에는 느티나무 뿌리의 수행법을 표절하기도 하지. 쌍떡잎식물 느릅나무과의 낙엽활엽수를 꿈꾸며 잠시 졸음에 빠진 채 갈팡질팡 초원을 찾아가기도 하지. 퇴화해 버린 직립보행을 한발 한발 복기하며 초원으로 단체관광을 가서 말을 타기도 하지.
-시집 <주점 타클라마칸> 걷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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