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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옥 시인 / 단단한 긍정 속으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9.
김은옥 시인 / 단단한 긍정 속으로

김은옥 시인 / 단단한 긍정 속으로

 

 

쓰러져 있는 비둘기 목덜미에

비둘기 한마리가 주둥이를 깊이 묻고 있다

꾸르륵 살아있다는 신호 아득하다

칼바람이 부드러운 털을 자꾸 일으켜 세운다

광장의 햇살이 모두 모여 그 모습을 비추고 있다

마지막 광점이다

청소원이 쓰레받기로 주검을 옮기는 동안에도

움직임 없이 서있다

죽은 자리 몇 바퀴 돌다가

바닥에 얼어붙은 빵조각을 쪼아보기도 한다

딱딱한 빵조각은 꿈쩍도 않는다

고개를 갸우뚱대며 먼 산을 바라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눈 쌓인 겨울 속으로 돌멩이처럼 날아간다

 

 


 

 

김은옥 시인 / 부고장

 

 

묘지들이 층층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아파트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있는 표식

비어있는 집 유리창마다 직사각형 노란색 종이에

검은색으로 써서 붙여놓은 ‘공가’*

한 공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차장이 텅 텅 비어갑니다

뿌리째 뽑혀버린 추억 하나가 머뭇머뭇

남겨놓은 발자국을 먼지처럼 걸쳐놓는 창가에서

감나무 가지가 종이 너머를 기웃거립니다

머리카락 풀어헤친 나무 그림자가 귀신처럼

종이 위에서 어지럽게 휘청입니다

종이 안에서 죽은 여자가 일어납니다

위층 노인의 관이 천천히 내려옵니다

검푸른 팔을 창밖으로 내놓고 까르륵대는 아이가 있습니다

모든 방들이 종이 안에 시커멓게 갇혀버립니다

한 집씩 한 집씩 자물쇠로 완강하게 채워놓은 공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부고장을 달고서

삼베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 공가空家 / 재건축에 앞서 이사 가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김은옥 시인 / 물음표가 반짝이는 냇가

 

 

한밤중에 눈뜨고 지금이 새벽이야?

저녁에는

지금이 밤이야?

새벽에는

지금이 저녁이야?

오후에는

지금이 아침이야?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야?

시냇물은 언제 잠 자?

 

시냇물 징검다리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은 어린 철학자가

돌 틈 사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살을 보며

“거품 봐봐, 비누 거품, 물이 눈 맞고 왔어, 구름 묻었어, 구름 만져봐, 구름 만져봤어? 하늘이 왜 이렇게 낮아? 왜 여기는 세게 흘러? 여기는 왜 풀이 하나도 없어? 이 물은 어디서 오는 거야? 언제까지 흘러가는 거야? 물이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오리가 되고 싶어.

 

백색소음 앞에 귀를 모으고 몰아沒我 되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버들강아지 같은 눈동자

물가죽 속에 감춰진 물 깊이를 알 리 없다

물속으로 어느 틈에 발을 넣는다

의문의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다

장화를 신겼지만 장화가 짧아서 바지가 다 젖는다

장화 옆구리에 그려있는 노랑오리가 납작해지자

엉덩이를 쳐들며 손을 담그고 만져본다

 

어린 철학자의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산더미 같은 물음표가 반짝인다

저 물결이 도달하게 될

서늘한 눈동자에 바다가 이미 출렁이고 있다

 

 


 

 

김은옥 시인 / 습(濕)

 

 

열리는 봄

 

쑥봉 하나하나가 임시 분화구다

봉홧불을 올리던 산등성이 같기도 한

온몸 곳곳에 봉을 올리고 불을 붙인다

봄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심지가 영산홍으로 피어나고

꽃의 혈맥이 몸 안으로 서서히 뻗쳐간다

오른 목 뒤로부터 오른 발바닥까지 스며갔다가

왼 발바닥을 거쳐 왼 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되올라온다

살아야지

그래, 살아야지

사시사철 한랭으로 부러질 듯 굳어가던 뼛속 계절을 파고들어

습을 모아 말리고 태우고 뜸으로 보송보송 부드럽게 이완시킨다

재로 변환되는 습

 

봄이 열린다

 

 


 

 

김은옥 시인 / 예약된 시간들 2

ㅡ아파트 재건축 현장

 

 

 불도저가 이승을 퍼 나르는 흙더미에 오래된 저승이 묻혀 실려 가면서 피식 웃는다 발인도 운구도 따르는 이 하나 없는 그래서 더욱 환한 빈터 단호한 집행자의 집게발 아래 소름 돋는 팔을 문지르다

 

 사인死因도 불분명한 임종을 조문하고자 소나기들이 달려왔으나 철제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이제 비가 직선으로 긋는지 사선으로 긋는지는 어느 입으로 씨부렁대든 내 알 바 아니다 정월 어느 날의 노인의 방화자살도 온몸 퉁퉁 부었던 붓기가 빠질 새도 없이 영영 간 여자의 마지막도 열아홉 소년의 수능점수 비관투신도 아파트 칸칸이 낡은 꿈들과 함께 버림받은 지 오래

 

 높은 철제문 다시 열린다 집채만 한 상여들 노제 떠난다 닫히고 열리고 다시 철제문이 닫힌다 장대비에 짓이겨진 아파트 뽑혀나간 검은 구덩이들마다 예비청약자의 호기심이 두근두근 선글라스 벗는다 봄볕 아래 이중삼중으로 늘어선 호기심들 끈기 있게 진맥 차례 기다리는데 철제담장 너머에서는 뇌 속까지 환히 비어가는 햇살의 염습을 마저 서두르고 있다

 

 


 

 

김은옥 시인 / 폭염

 

 

이미 죽은 것들은 도로를 피하지 않는다

 

바닥에 끈끈하게 재봉 되어가는 주검

불 꺼진 눈구멍에 켜켜이 쌓이는 먼지들

아스팔트 묵은 상처가 흘리는 체액이

바퀴에 진득하다

아우성치며 달려가는 바퀴들 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머리 풀어헤친 아지랑이

 

도로는 끊임없이 도로를 낳고

주행 표시는 끊임없이 화살표를 낳고

화살표는 끊임없이 죽음을 낳는다

종점도 없고 상처도 없이

구만리 장천 흰 상여 한 채 떠가는데

검은 상복 입은 아스팔트가/ 뙤약볕 아래 땀 흘린다

 

아스팔트 파인 흉터에 핏물이 고여 든다

 

 


 

 

김은옥 시인 / UFO, 그리고 찢어진 전단지

 

 

폐지트럭에서 종이들이 날아온다

지구가 큰 숨을 몰아쉬자 태풍이 지나갔다

한 달 전 내다 버렸던 적자투성이 카드명세서와

오래전 끄적거리다 던져놓았던 시 몇 편도

울긋불긋 함께 날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던진 색종이 비행기는 어디를 날고 있을까

땅바닥에 금 그어 띄웠던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수상하다 뭔가 대단히 비밀스럽다

날아다니는 압축폐지를 감시하려는지

여기저기서 레이더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단풍도 아닌 것이 이건 분명 외계에서 온 것일 거다

고속도로 위를 선회하다가 높이 솟구친다

멈칫거리는 차 지붕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비행선처럼 앞 유리에 옮겨 앉기도 한다

‘우리ㄴ?’란 글자가 보인다

우리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어쨌다는 걸까

갸우뚱 대던 ‘우리ㄴ’가 날아가 버린다

하늘 저 멀리 흰 빛으로 사라지는 우리ㄴ

소통불능으로 나는 우리ㄴ를 따라갈 수가 없다

뒤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접시만한 두 눈을 번쩍이는 또 다른 괴물체들

색종이 비행기도 우리ㄴ도

어디에 가 닿으려는 걸까

비상 깜빡이 점멸하는 길 위에서

트럭이 속력을 낼수록 하늘 가득 반짝이는

수많은 비행선들

 

 


 

김은옥 시인

2015년《시와 문화》 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안개의 저쪽』.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의. 우리시. 시산맥특별회원. 현대시학회. 청미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