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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솔 시인 / 불멸의 손톱
고양이 손톱으로 흥건한 피맛을 보았다 깊숙이 나를 찌르며 고통스러웠다 뒤척이는 꿈속 살갗을 긁는 손에는 칼날 같은 손톱이 자라나 있다 가려운 것은 살갗뿐만이 아니라 관계이고, 진실이고, 패랭이꽃이고 쓰다만 글귀의 푸성귀 같은 진정성이다 달빛의 능선에는 빛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 가파른 벼랑 끝이 위태롭게 깎여나간다 독이 오른 손톱은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린다 예기치 못한 신념을 향해 날을 세우다가 자신을 해치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키운 독기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몸의 세포들이 파괴되어 세포 아닌 것이 되고 조직이 경직되어 조직 아닌 것이 된다 꼼짝없이 자신에게 결박당하는 순간에야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비애가 있다. 푯대 잃은 날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손톱 위에 초승달, 그것을 나는 불멸이라고 부른다 밤마다 몸속을 휘젓는 불멸을 깎아버리고 더는 혼란스럽지도 무기력하지도 않으려 하지만 먼 기억 속의 나에게서, 또 다른 나에게로 푸르스름하게 이어지는 불멸의 시간을 본다 지면 위에 떨어진 손톱들, 독기가 풀려간다
박현솔 시인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빗방울이 땅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선화공주를 사랑한 서동이 연잎으로라도 남아 선화공주를 바라보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에야 문득 펼쳐진 잎사귀, 저 연잎의 의미를 다시 읽고 있다
박현솔 시인 /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
번개를 맞아 까맣게 타버린 나무. 전율을 느낀 영혼은 몸이 들리던 순간에 몰두한다. 음악이 어두워진 몸속을 흘러 다니고 주름들이 물결을 만든다. 풍랑이 일고 너울이 거세진다. 주름들이 활짝 펼쳐질 때, 어떤 간구는 신에게도 감동이다.
고대 원주민들은 태어나거나 결혼할 때, 생을 마감할 때 춤을 추었다. 존재가 성숙해지는 것은 신의 은총이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와 씨를 뿌릴 때에도 춤을 추었다. 존재를 먹여 살리는 것 역시 신의 은총이다. 강이나 들판이 숙성되는 동안 박자도 느리게 흘러간다.
가뭄이 들거나 부족 간에 전쟁이 벌어질 때 전사의 후예들은 춤을 추었다. 존재가 심약해지는 것은 신의 소관이고,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 둥글게 모여 춤을 추었다. 신을 경배하기 위해 춤을 추고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춤을 추었다. 붉은 칠을 한 전사들의 화려한 몸짓은 생명의 지속을 갈구하는 춤.
이전의 춤은 부족원에게 자랑스럽게 전승됐지만 오늘날 청춘들은 불안과 우울을 견디기 위해 춤을 춘다. 태양과 달의 주기를 벗어난 운행으로 자유로운 몸짓들. 간절한 기원과 간구를 담을 수 없다.비트와 욕망이 풀어내는 춤. 세상의 모든 나무와 들판을 다 태우고도 성에 차지 않을 번개와 벼락의 난무.
어떤 춤은 하늘을 머리 위에 내려놓아도 무겁지 않고, 땅을 딛고 있으면서도 자유로우며, 경계 없이 어울려도 예의바르며, 우주를 어지럽게 가로질러도 난폭하지 않다. 그것은 나무의 춤이고, 별의 춤이고, 우주의 춤이다. 이런 춤판엔 신도 가끔 어울리신다.
-시집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에서
박현솔 시인 / 처마
무심히 만석공원을 거닐던 내게 빗방울이 엇갈리며 후두둑 떨어진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움찔거리는 벚나무들 어디에도 처마는 보이지 않는다
빗방울은 나무의 뿌리까지 적시며 거세지고 호수의 둥근 어깨도 비에 젖고 있다
빈 의자 위에 있던 과자 봉지 안 달콤함을 탐하느라 정신없는 개미떼들
때론 달콤함이 처마가 되어주기도 하지
빗방울에 놀란 비둘기가 똥을 내지르고 풀섶에서 오리가 빗소리를 들으며 알을 낳고
비를 피하느라 사람들이 흘리고 간 발자국들 자신이 끌고 온 길들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이다
만석공원에서 소나기가 불러온 풍경들을 보고 있다
-한국시학(2011. 여름)
박현솔 시인 / 도화에게로 걸어 들어가네
저 빛깔을 어쩌면 좋은가. 두 팔로 품어 물들고 싶네 맨발의 설렘으로 다가간 언덕 위에 오랜 약속처럼 도화나무가 있고 전하지 못한 안부들이 도화 꽃으로 만발하네
청춘은 불안하고 무모했으며 위험천만이었다 먼데서 꼬드기던 소리들은 오간데 없고 어떤 향기에는 슬쩍 눈 감을 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도화나무 아래에서 뛰어놀고 강아지들도 꽃잎을 따라다니느라 분주하다
도화 꽃잎들 분분히 날리는 오후의 경사를 꽃물 든 손을 맞잡고 그와 꽃그늘을 거닌다
도화가 우리에게, 우리가 도화에게로 걸어가네 폭풍을 견딘 연분홍 꽃잎들이 황홀하고 향기롭다
도화가지 늘어진 자리에 흘러내리는 꽃물이 두 눈에 차고 넘쳐서 오후의 아이들을 물들이고, 강아지를 물들이고, 경사진 시간의 언덕을 물들이고,
손을 맞잡은 우리들의 맹세를 물들이네
박현솔 시인 / 추종자
달님! 당신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에요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어가는 모습을 날마다 보면서 세상의 만물은 조금씩 변해가요 저도 달님처럼 변해가는 성격을 갖게 되었어요 달님이 완벽하게 둥글었을 때 저도 생동하는 에너지로 생글거리고 달님이 초췌하게 야위었을 때 저도 까칠하게 무의식의 벽을 긁어요 그렇게 당신을 추종한 덕분에 이젠 변덕쟁이가 되었어요 오죽하면 여자는 달의 주기를 따른다고 하겠어요 그렇게 당신 따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했어요 이제 몸과 영혼이 당신과 하나가 됐어요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힘들어해요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내 변덕스런 성격이 싫대요 어떻게 맞춰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대요 이런 성격으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요 도와줘요 제발, 만약에 도와줄 수 없다면 나에게 이거 하나만 약속해줘요 이제부터 보름달일 때에만 내 창가를 비추겠다고 모나지 않고 둥근 사람들 속에서 살래요 둥근 사랑을 하고 둥근 세상을 살아갈래요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그땐 모른척해 줘요 당신은 이제 어쩌다 보는 보름달인 거예요 하지만 부디 슬퍼하지 말아요 내가 떠나도 다른 추종자가 올 테니까
박현솔 시인 /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바다여, 잘 있는가 뜨거운 햇볕의 기세가 누그러진 지금 나무들이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있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다른 존재에게 기대어서만 살아갈 수 있어 신이 인간에게 두 개의 손과 발, 머리를 주신 것은 세상 만물 속에서 굳건히 생존하길 바라신 거지 그런데 너는 인간의 편인가 아닌가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니 알 수 없어 넌 인간에게 생선을 주고 살아갈 방편이 되어주었지 만약 네가 내일부터 파업을 한다면 아마도 굶어 죽을 인간들이 수두룩할 거야 그럼에도 인간은 감사함보다 허세를 부리고 자연을 모두 정복한 것처럼 떠벌리지 그런데도 어쩜 너는 그럴 수 있어 인간이 값싼 플라스틱을 만들어서 쓰레기 산을 만들고 바다를 오염시킬 때에도 너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어 너의 친구들 고래와 생선, 해초와 거북이가 플라스틱 줄에 칭칭 감겨있을 때에도 너는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지 그것들은 곧 내장 깊이 쌓여갔고 네 친구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어 인간의 이기심은 끝이 없어서 바다로 미사일을 수없이 쏘아올리고 대량 살상 무기와 핵 개발에 몰두했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키워나갔어 그뿐만이 아니야 드러난 것 외에도 공장들은 몰래 폐수를 흘려보내고 오염수가 지구의 구석구석을 돌고 있어 어떡하면 좋아 인간의 이기심이 끝이 없잖아 언제까지 네가 참아줄 거라 생각하는지 날마다 먹을 것을 내어준 은혜를 이렇게 갚는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인간들을 부디 용서해줘 그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한낱 신의 창조물일 뿐이니까 수많은 그물을 품은 네가 이해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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