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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형철 시인 / 멀고 먼 절반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황형철 시인 / 멀고 먼 절반

황형철 시인 / 멀고 먼 절반

 

 

돌아누운 아내 등을 보고

촌수마저 없는 이이를 참 몰랐다는 생각

 

정작 몸의 딱 절반인데도

제대로 본 적도 안은 적도

옷 속으로 슬쩍 손을 넣어 본 적도 없는

 

아득히 깎아지른 저 아래 후미진 곳에

깨지고 흩어진 별자리와

열흘을 채 피지 못하고 떨어진 꽃봉오리만 가득

 

꽃 본 나비처럼 평생 살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준

아내의 절반이

오늘 밤은 아득히 멀고 멀어서

 

건널 수 없는 절벽 하나씩 갖고 사는 게

부부인가 싶기도 하였다가

다른 절반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절반이 짠했던 것인데

 

벼랑 끝 틈새 흙 한 줌 잡고서

기어이 피어 있는 노루귀를 보았다

 

-시집 <그날 밤 물병자리>에서

 

 


 

 

황형철 시인 / 가문비나무

 

바이올린 공명판에는

이삼백 년 천천히 자라며

가지도 없이 밑동에서부터 수십 미터 쭉 뻗은

가문비나무가 가장 좋아요

 

빛을 받지 못해 말라죽은 삭정이

스스로 떨군 자리에

단단하고 진한 향기 밴

옹이가 생겨나

둘도 없는 울림을 만드는 것이죠

 

상처가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혹여라도 가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손금처럼 쥐고 태어난

옹이 몇 개가

나를 키웠다는 말은 끔찍하고

 

상처 많은 사람이 다 악기가 되는 것도

악기가 모두 음악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

어른이 돼서야 알아서

 

더는 상처를 키우지 않으려 악이나 쓸 뿐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움을 덜 타고

그럭저럭 추위도 잘 참으니

다소간 숲도 그늘도 가질 수 있겠지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황형철 시인 / 결벽

 

 

어떤 집념이

수직의 절망을 오르게 하나

 

소리도 없이

활발한 폐활량으로

결연하게 그늘을 넘으며

 

세상 가장 낮은

공손으로

제 길을 낸다

 

긁힘도 깨짐도 낙서도

벽의 요란은

침묵으로 덮으며

벽을 사이에 두어

생겨난

요원한 경계마저 허물고

 

아무 결탁 없이도

잠잠히 공空을 채우며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담쟁이는

벽의 전부를 지운다

 

 


 

 

황형철 시인 / 4월 동백

–섬 3

 

 

청명을 앞뒀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동백이 한창이다

 

큰넓궤에도 피고 너븐숭이에도 피고 빌레못굴에도 피고 섯알오름에도 피고 송령이골에도 피었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파도 덮쳐도 꺼지지 않게 애지중지 겹겹으로 불씨 에워싸 금방이라도 타오르겠다는 듯 환하지만

 

삼촌이 건넨 식은 지슬 같아서 어멍이 잡아준 마지막 손길 같아서 누군가 머뭇거리다 몰래 내건 조등弔燈같아서

 

어쩌나 차마 고개 들 수 없다 바라볼 수 없다 만개한 숲으로 들 수가 없다

꽃이 지는 찰나에도 꽃을 붙들고 있는 그림자가 유난히 깊은 어둠 같기만 하여 붉게 뜨겁게 가슴이 타기만 하여 파리한 나무처럼 서서 한참을 울었다

 

 


 

 

황형철 시인 / 고목 아래

 

 

 온몸 칭칭 감는 햇살 그늘로 엮는 재간을 가져야 한다 천둥과 번개의 격한 심사 헤아리고 바람의 장단이나 고저에 주의 기울여야 한다 수많은 벌레의 기거를 들어주고 간밤에 내려앉은 별들의 사정을 새기는 것은 물론 쌀알처럼 나리는 눈마저 맨살로 안아야 한다 시시로 찾아오는 나비나 쇠박새의 전언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아무런 호명 없는 저녁의 든든한 하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상詩想몇 줄 얻어 볼 참으로 열매가 맺기까지 전말을 추적하다가 모름지기 나무에 대해 생각해보는

 

 


 

 

황형철 시인 / 배추밭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하늘에가 닿으려는 배추벌레가 열심히 배밀이하며 길 내기 때문이지

 

 널찍한 배추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잠자리에 든 배추벌레가 떼 지어 하늘을 나는 꿈 꾸기 때문이지

 

 나비 날개가 둥글디 둥근 것은 이파리 갉아먹으며 숭숭 구멍 내던 어릴 적을 필시 기억하기 때문이지

 

 


 

 

황형철 시인 / 문하(門下)

 

 

 손바닥만 한 마당에 남새밭이 생겼다

 연필만 잡아본 손으로 언감생심

 고랑이나 멀뚱히 바라보다가

 농부는 농사를 짓고

 나는 시를 지으니

 꼭 다르기만 한 업종은 아니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은근히 붙기도 했다

 샛노란 배춧잎의 은은한 단맛을 알아

 벌써부터 헛침이 돌고

 이파리가 자라며 잔잔히 허공을 밀면

 마당은 나만의 작은 파도로 출렁이니까

 멀리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정작 기대하는 게 따로 있는데

 무슨 셈이 있어서보다는

 약 같은 거 칠 생각도 없이

 생각나면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민달팽이 배추흰나비 내게는 해로울 게 없는

 벌레들이 놀라운 식성을 발휘하여 만든

 구멍이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다

 진짜 농부가 본다면 끌끌 혀를 차겠지만

 어머니라면 두둑에 콩이라도 키워

 놀리는 땅 하나 없겠지만

 벌레들 문하에 들어서라도

 송송 구멍을 내는 기술도 좀 익히고

 그것들 한데 모아 싯줄로 엮고 싶은 거야

 내 오랜 공부도 실은

 세상을 둥글게 만들어

 숨을 틔워주려는 일이니까

 벌레도 나도 하등 다를 게 없으니까

 

-《공시사》 2023년 11월호

 

 


 

 

황형철 시인 / 동백이 피었나 안 피었나 궁금은 하고

 

 

 삼백오십 살쯤 됐다는 화엄사 홍매에 주말 인파 몰렸다는데 한눈에 봐도 우아한 자태에 가 보고 싶은 속내 숨길 수 없지만 그래도

 

 동백이 피었을까 제일 궁금스럽다

 

 벚꽃이 활짝 전농로나 녹산로 소식은 심심찮게 오고 오동도나 선운사 같은 전국적 명소도 있지만 비할 게 아니고

 

 동백은 향기가 없어 빛으로 새를 불러 모은다지

 

 큰넓궤 가는 길에 잃어버린 마을에 점점이 피기 시작할 즈음 제법 시적인 말을 근사하게 얹어서 부쳐 준다면 그 사람 평생 사랑하고 말 텐데

 

 누추한 뜰이나마 한 그루 가꾸어 설룹게 스러진 정낭 살그머니 어루만지며 빛으로 말하고 음악도 풍경도 지을 것을

 

 남쪽 섬에서 연락이 오나 안 오나 빨갛게 속을 태우고 있다

 

―시집 『그날 밤 물병자리』에서

 

 


 

황형철 시인

1975년 전북 진안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 계간 [시평]을 통해 등단. 현재 계간 『시와사람』 편집장과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광주MBC에 재직하고 있다. 시집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