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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훈교 시인 / 문득이라는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정훈교 시인 / 문득이라는 말

정훈교 시인 / 문득이라는 말

 

 

새벽잠, 부엌에서 물을 먹다가

문득 드는

 

왜 죽음 앞에서는

이런저런 의식이 많은 것일까

 

왜 그림자무늬를 잔뜩 닮은 전갈처럼

마지막 의식은 저토록 환한 것일까

 

그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때

늙은 기도처럼, 너무 긴

 

독백

 

반짝거리는, 지느러미처럼 떠오르는

 

죽음

 

짧은 주술처럼

고래 배 속을 헤엄쳐 온,

 

당신

 

문득이라는 말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중에서

 

 


 

 

정훈교 시인 / 그믐

 

 불안은 달을 먹고 자란다. 처음 생리하던 날, 처음 교복을 입던 날, 처음 자전거 타던 날 다양한 체위가 태어났다. 후배위 달이 당신을 먹는 거다. 막대사탕과 솜사탕의 달콤함은 미적 감각과 형태 감각의 憑依빙의. 당신과 당신 안의 내가 접신이 되는 거다. 당신을 먹는 혀나 달을 삼키는 혀 모두 춤을 추는 일. 어느 쪽도 당신을 녹이기엔 마찬가지. 정상위 달도 당신도 서로의 등은 볼 수 없다. 당신의 먹성은 침엽수림을 닮았다. 인중 아래 파란 입술은 불안의 인공위성. 신호가 잘 잡히는 안테나. 포개어지면 불안과 달의 합궁. 목덜미에 붙은,

 불안은 달의 혀로 지우고 달의 혀는 적막으로 지운다 두 개의 무덤을 지나 하나의 문이 되는 스무고개. 당신은 그곳에서 태어났고 불안은 그곳에서 소멸된다 달은 태생이 불온한지라 날마다 배꼽 없는 아이를 흘려보낸다 오늘도 불안이 달 주위에 모여 있고

 그녀는 그믐을 낳는 중이다

 

 


 

 

정훈교 시인 /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석류알처럼

붉은 슬픔이 잠들어 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아'에서

'ᄋ'이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다

 

물론 당신이 떠난 날도 여러 날 그러하였다.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중에서

 

 


 

 

정훈교 시인 / 낭만처럼, 헥토파스

 

 

 그녀의 귓볼을 15데시벨, 쉰은 족히 넘었을, 얼핏 보면 울음이 그녀를 품고 있는 것 같아 중심엔 지금 최대풍속 17m/s 이상의 바람이 일고 있는 중이야

 

 빗살무늬 토기에 그려진 전설에 따르면, 여울목에서 청춘을 담금질하는, 풀무로 인 바람이 미처 실어 오지 못한, 여인 이 있었어

 

 가슴에 쌓이 눅진한 공기가 물결처럼 파랑을 일으켰지 풀무질로 계집의 메마른 생을 축낸 사내도 도회지 문밖으로 나 가지 못할 生이란 걸 오늘에야 안 게지 사내는 밤마다 여인에게 방아쇠를 당겼고 총소리와 폭죽의 귓볼은 140데시벨 로 욕을 퍼부었어 팽팽해진 서로의 울음은 두드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기만 해도 팡 터졌을 거야 몸 안 공기가 이슬 점이랑 같아진 폭풍우를 안고 먹구름이 한꺼번에 몰려온 게지 마른 자궁을 뚫지 못해 단단히 여문 그믐에, 그녀도 그녀 의 꿈이 부화될 수 없는 무정란이란 걸 안 거야, 그녀가 품어온 윤달 보름은 너무 밝아 오히려 빈,

 

 낭만처럼

 

 


 

 

정훈교 시인 / 저문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읽다

 

 

 수면을 등지고 내게로 옵니다 돌의 무게가 파문의 크기로 옮겨 붙는 순간입니다 당신의 고요가 깨어나는, 강가에 서서

 

 아직은 수평인 파문에게 물수제비를 띄웁니다

 

 당신을 펼치자마자 강의 배꼽이 출렁이고 노을이 자지러집니다 파문마저 이내 수평으로 재우는 당신의 수심을 헤아려봅니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솟구칩니다

 

 바람이 깨지고 물의 이마가 깨지고 붉은 노을이 깨지고 어둑한 파문이 채 가시지 않는 강가에 나와 당신에게 거룩한 나를 띄웁니다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가 쌓이고 나면

 

 당신, 어느 날엔 비스듬히 빗겨간 물결들을 읽을 테지요

 

-시집 『또 하나의 입술』에서

 

 


 

 

정훈교 시인 / 적(赤, 迹, 敵, 吊)

- 작약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읍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Paeon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不立文字

 

 


 

 

정훈교 시인 /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폭우였다가 모든 것이 페허였다가, 모든 것이 바람으로 흩어지는, 소읍의 밤

 돌 깨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 낮달이 비틀거리며 골목에 드는 소리, 종점에서 돌아 나오는 시외버스 엔진 소리,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열기 전까진 문이 아니라 창(窓)이었던 당신이 있다 천천히 열려다가 덜컥, 눈 맞은 경칩에 이르러 울음을 쏟아내던 당신이 있다, 천장을 향해 발라당 누운 밥상 다리를 보며 어느 문으로 왔을까 고요에 떨다가 밤새 독기(毒氣)를 품은 적이 있다 널브러진 오이소박이며 호박잎을 보며 그 모두가 장판의 얼룩으로 남아 전통문양을 이루던,

 사춘기를 통째로

 건너간 문이 있다

 몇 번의 문을 지나 거뭇해지고

 몇 번의 문을 지나 달거리를 시작하는 소읍(小邑)의 밤

 온통

 환한 문이 있다고 치자

 듣다가 문득 고요해지는, 환한 문(門)이 있다

 (수구릿재 밤길은 사방이 온통 어둠뿐이어서 발자국마저 유령처럼 논밭을 떠돌아다녔다. 마을회관에 부딪힌 발자국 소리는 제 풀에 놀라 비명을 지르곤 했다.늘 그렇듯 모든 소리들은 저 문을 통해 다녀갔다)

​-시집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2020)

 

 


 

정훈교 시인

1977년 경북 영주 출생.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석사) 졸업.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또 하나의 입술』 『어떤 이름은 너무 아프다』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젊은 시인들’ 동인. 현재 시집서점 겸 출판사 시인보호구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