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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녀 시인 / 바다에게 의탁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김길녀 시인 / 바다에게 의탁하다

김길녀 시인 / 바다에게 의탁하다

 

 

뱃머리에 물보라 덮어쓴 별조각들 쏟아져내린다

입술 부르튼 휘파람이 아슬하게 심장을 핥아댄다

날 것을 유혹하기 위해 본류대에 미끼를 던지는 등 뒤에서

돌아 보지마라 흩날리는 쉰목소리가 다그친다

파도 모가지를 심하게 비튼다

피항으로 통하는 노선의 천기는

밀향고래 꼬리를 흔들어 심연을 부풀어 올리고

출항하는 남항방파제 빨간 등대 밑에서

램프의 심지를 키우던 애인

목청을 피로 적시던 눈빛도 수평선 끝에서 낮게 포복한다

석양 부스러기 선교 유리창에 얼룩으로 남고

그리움도 견뎌야하는 것임을

오랜 시간 후 관자놀이에서 자근거리던 바다가 말해주었다

사랑도 녹스는 출항은

뼈아픈 도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어깨를 토닥거려준다

 

 


 

 

김길녀 시인 / 그랬다

 

 

어제 오늘 죽은 시인들

시집을 읽는다

 

자주 눈이 감겼다

 

가을 햇볕은 손등이

익기에 알맞은 온도로 스며든다

 

죽은 자들을 불러오기

좋은 가을 한낮

 

- 『작은 詩앗 채송화 제25호』, 고요아침, 2021

 

 


 

 

김길녀 시인 / 오후의 사과나무

-여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여자들

골짜기에 둥지 튼 여자네

사과밭 안 누옥에 모였네

 

그들에겐 고향, 몇 몇에겐 타향이었다가 고향이 되어버린

두꺼운 도시와의 인연

조금은 울다가 더 크게 웃고 있는

마흔 밖의 여자들

 

숨겨 놓은 열쇠와 열어둔 다락방

빈집 고요를 허락한 여자네 집

글자락으로 생을 파먹는 여자들

시간을 만지는 손길이 따뜻하다

 

누군가는 아주 길게

누군가는 조금 짧게

어느 계절

잡지라는 공간에 세 들어

문장이란 이름 빌려

길거나 짧았던 하루

다정한 안부로 풀어내리라

 

사과나무 잎사귀들 천천히

그려가는 달콤한 향기의 지도

여름비 내리는 둥근 지붕 위에

작은 깃발을 꽂고 왔다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애지, 2022)

 

 


 

 

김길녀 시인 / 성채

 

 

중국 산성

우타이산 가는 길

 

75세 노스님

세 달째 오체투지로

순례중이시다

 

세상과 가장 가까이

몸 닿으니 그 얼굴에

햇살 가득하다

 

노승의 온몸이 하늘로

하늘로 길을 내고 있다

 

 


 

 

김길녀 시인 / 인도양에서 온 편지

 

 

 인도양에 비 내립니다.고향의 청보리밭인줄 알았습니다. 하늘거리는 몸짓 연하디 연한 무명뼈 아래 모질게 돋아나는 야성의 발톱입니다. 만유인력으로 맺혀 물이랑 거칠게 달구는 파도를 보리잎사귀인줄로만 알았습니다. 별리의 뿌리로 바다를 휘감아 온몸을 찢어내는 것이 슬픔인줄 몰랐습니다. 해원에는 고요보다 적멸이 유랑합니다. 몰디브 섬 위로 스콜이 내립니다. 바람은 수평선을 잡아 주름골짜기에 심어놓습니다. 싸이크론의 눈은 맑아져 빗소리에 젖었다 풀리고 접혔다 펴집니다. 심장소리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듭니다. 그 행로 벵골만으로 치닫는 폭풍의 깊이로, 오늘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슬픔 견디지 못해 뜨거운 핏줄 허리에 두르고 조타륜 돌리겠습니다. 여름이 오고 있습니다. 고향에도 장마가 오고 있답니다. 알바트로스 날개죽지에서 낙하하는 "아프지마 아빠, 사랑해요". 비 내리는 이곳에서 홀로 젖는 몸은 15도 롤링으로 흐느낍니다. 그리움도 푸르게 젖어 인도양을 건너갑니다.

 

 


 

 

김길녀 시인 / 옛집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 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이슬을 낳는다

 

 


 

 

김길녀 시인 / 이상한 나라의 낭독회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여름 저녁

 

창덕궁 가는 길 근처

책 익는 냄새로 가득 찬 지하 창고

선남선녀 고급 독자와 소설가 그리고 시인들

민소매와 긴 옷소매의 동물 복장으로

헌책 뭉치 의자에 앉아 있다

 

가끔씩 꼬맹이선풍기 바람이 손님같이

다녀가고, 낭독자 목소리는 비밀회담 문서처럼

낮은 울림으로 무대 앞에서만 흔들린다

 

들리지 않는 문장들이 조용히 잠식한

곰팡이처럼 강한 냄새만으로 시야에 꽂힌다

 

진지함만이 높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

길거나 짧은 문장 옷을 걸친 글자들

멀지 않은 시절의 유령같이 노랑 먼지 쌓인

책과 책 막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춘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표지가 뜯겨진

심리학 저서만이 기울어진 책장 틈에서

처음부터 열심히 듣고 있다

 

짧거나 긴 낭독의 시간이 지나자 의자가

되었던 뭉치 책들이 해바라기꽃처럼 크게 웃는다

 

어떤 회사 100년사는 오랜만에 보는

세상 밖 아이들의 놀이에 두꺼운 표지가

터지도록 꽃보다 더 크게 웃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여름 저녁

 

 


 

김길녀 시인 (1964-2021 향년 57세)

1964년 강원도 삼척 출생. 부산예대 문예창작 전공. 1990년 《시와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바다에게 의탁하다』 『푸른 징조』. 사후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 출간됐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수상. 2003년께 유방암 진단을 받고 그동안 투병. 2021년 5월 12일 타계.(향년 57세). 부산작가회의 사무차장, '작은詩앗·채송화' '예감' 동인, 부산시인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