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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운 시인 / 고여 있는 시간
시간은 흐른다고 했던가 흐르고 흘러 텅 빈 곳 기억만 무럭무럭 자란다 그럴 때는 보던 책도 덮고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고요 고요가 고요를 덮고 적막이 적막을 누르고 그 속에 살아나는 절대 풀어지지 않고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당신이라는 단단한 시간
-『문학청춘』 2017-겨울호
한소운 시인 / 망초
방문 양옆으로 나일론 줄을 치고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커튼이라고 좋아라 했던 아늑한 방,자취방 창호지 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
철들기 전에 지는 꽃도 있지
한소운 시인 / 내 인생에 끼어든 사람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출근길 버스가 급정거 했다 차내의 사람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 화가 난 기사님 내려가더니 승용차 기사를 버스 안으로 데리고 올라왔다 손님들에게 사죄하란다 그 남자 절을 꾸벅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했지만 차안의 사람들 출근시간에 마음만 동동 그의 사과보다도 빨리 출발했으면 하는 표정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든 사람 위험한 휘청거림 종착지가 어디인지 순간 목적지를 잊고서 흔들리며 갔지 아득히
-월간 『우리시』2010년 8월호 발표
한소운 시인 / 차를 끓이며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하여 공손히 비어있는 찻잔을 준비하였습니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이름 모를 산골짜기 굽이 굽이 말없이 흘러 이리 합치고 저리 휘돌아온 물의 내력을 더듬어 봅니다
찻잔 속에 하늘과 구름 가난한 마을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숨소리들 맑게 어릴 때
찻잔 속에 가만히 동그라미를 그려 봅니다
처음과 끝이 하나인 동그라미 사랑 안과 밖이 없는 또 하나의 우주가 찻잔 속에 어립니다
한소운 시인 / 혜초, 왕오천축국전
그예 떠나시렵니까 간곡한 만류 뿌리치고 그예 가시렵니까 가는 길이 없으니 오는 길이 어디 있으며 마음 밖에 마음 없으니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귀막고 눈감고 가는 길이니 사막도 설산도 두렵지 아니한 까닭입니까 오늘 홀연히 길이 보인다 한 치 문 밖도 나서지 않은 채 한평생 살아 섬긴 서성거린 발자국 모아 글을 이루나니 그대들이여 부처를 보지말고 눈을 찔러 나를 잊게 하라 그저 바람의 흔적을 옮겨 놓았을 뿐이니 누가 이 세상을 온전히 보겠는가
한소운 시인 / 헛꽃
겨울꽃 보러 서해로 갔다 눈보라치는 가슴 한복판 사랑의 묘약같이 노란 매화, 납매 보러 갔다가 헛꽃이라는 허허로운 이름에 마음 오래 빼앗긴 산수국의 꽃받침 벌 나비 유인하여 씨앗 맺게 해주는 헛꽃의 향기처럼 지상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손발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고 하얀 얼굴로 살랑살랑 날갯짓하는 꽃받침 까무룩하게 나를 죽인다
한소운 시인 / 시골쥐와 서울쥐의 대화 시골쥐 : 어떻게 지내세요? 서울쥐 : 외로워서 밥 먹고 쓸쓸해서 밥 먹고 심심해서 먹고 또 먹고 종일 먹다보면 해가 저물죠 거긴 어때요? 시골쥐 : 해 뜨면 밭 메고 외로우면 풀 뽑고 종일 흙 만지고 놀죠 비 오는 날은 혼술이 그만이죠 서울쥐 : 낮에는 풀 뽑고 밤엔 뭐해요? 앞마당에 흘러내리는 적막강산 그 캄캄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요? 시골쥐 : 흙벽에 기대어 바람에 실려 온 삼라만상, 우주만물의 희로애락에 취하죠 서울쥐 : 여긴 24시편의점, 24시콩나물국밥집 휘황한 불빛으로 불면에 시달려요 시골에선 캄캄한 어둠을 볼 수 있겠죠? 시골쥐 : 서울처럼 소음과 불빛은 없지만 몸이 가려워 잠들 수가 없어요 논밭의 농약, 제초제 농사철엔 숨이 막혀요 서울쥐 : 여긴 페트병, 스티로폼, 비닐. 플라스틱 쓰레기더미 속에 살아요 오늘이 춘분이네요 땅속은 분주해지겠죠? 시골쥐 : 흙은 어떤 색을 만들지 꿈에 부풀어 포실포실 순해지고 있죠 새가 집짓는 나무는 베어서는 아니 되고 괭이 들었다고 함부로 땅을 찍어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다들 연장 끝을 벼리고 다듬네요 서울쥐 : 시멘트박스 같은 아파트에도 봄볕이 오네요 시멘트집이나 흙집이나 지구 귀퉁이에 깃들어 있으니 남쪽에서 꽃샘바람이 불어오네요 시골쥐 : 산천이 바람의 붓끝 따라 노랗게 붉게 변해가요 꽃구경 오세요 우리 같이 꽃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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