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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수명 시인 / 누워 있는 사람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0.
이수명 시인 / 누워 있는 사람

이수명 시인 / 누워 있는 사람

 

 

누워 있는 사람은 풀밭을 열고 눕는다

풀은 오늘 부드러운 차양

 

땅을 온통 감고 기어가는 풀들도 있지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양은 갈가리 찢긴다

태양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때

눈물은 밖으로 떨어진다

 

누워 있는 사람은 감정에서 떨어져

감정이 되려는 사람

감정과 교대하는 사람

육체보다 길어진 사람

 

모든 발목이 흩어진 사람

모든 도약이 사라진 풀밭

모든 풀이 짧게 잘려 나간

 

입을 막고

지구처럼 생긴 아주 둥근 말을 해본다

 

등이 굽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이수명 시인 / 꿈

 

 

 그의 꿈과 꿈 사이에 나는 나의 꿈을 놓았다. 나의 꿈과 꿈 사이에 그는 그의 꿈을 놓았다.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웠다. 푸른 새벽이면 그 나란히 놓여진 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꿈으로 꿈을 붙잡았다. 꿈으로 꿈을 밀어냈다. 밀다가 밀리다가 그의 꿈과 나의 꿈이 겹쳐지면서 꿈은 지워졌다. 나는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잠 속에서 꿈은 파도가 밀려간 뒤의 조개껍질처럼 드문드문 흉터가 되어 박혀 있었다.

 

 


 

 

이수명 시인 / 풀 위에서 웃었다

 

 

 한번은 풀밭에 서 있었다.

 앞만 보고 풀만 보고

 풀 속에 죽어버린 쥐가 있었다.

 죽은 채 발견되는 일을 생각한다.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멀리는 못 간 것이다. 안 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가지는 못한 것이다.

 

 풀이 찢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찢어져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이 풀밭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돋아나면 오세요

 남자는 남자에게서 비켜서고 여자는 여자에게서 비켜서고

 남자는 여자를 떠나고 여자는 남자를 떠나고

 두 사람이 풀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풀을 밟지도 않고

 풀을 누르지도 않고 걸어갔다.

 

 풀 위에서 동작은 실현되지 못한다.

 자연이 먼저 찢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도 무심한 풀은 돋아나고 이리저리 아무 데나 돋아나고 심심풀이로 돋아나고 머릿속에도 돋아나고 그래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머리를 숙여도 아무리 숙여도 머릿속의 풀을 토하지는 못한다.

 

 한번은 풀 위에서 웃었다.

 풀의 전위

 발끝을 세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도

 풀은 다시 반짝이고

 

 


 

 

이수명 시인 / 도시가스

 

 

짐을 가지고 오지 마

짐을 항상 너무 많이 가지고 오잖아

짐을 둘 데도 없잖아

거리를 걸어가다 말고 같은 시간 같은 길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또 말다툼을 한다

 

장소부터 말해봐

어느 국수집으로 가는 건지

아까 본 베트남 쌀국수는 사거리 번화가에 있고

베트남 쌀국수는 어디에도 있다. 다음 골목에도

베트남 쌀국수 계속 베트남 쌀국수

 

어느 집으로 갈 건지

베트남 쌀국수 집엔 사람이 많아

항상 많잖아

테이블이 몇 개 붙어 있는 좁은 집인데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잖아

 

너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데를 검색해보자

네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잔뜩 얹어주는 곳

 

 


 

 

이수명 시인 /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겨진 신발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원인들은 무사히 지냅니까. 시체들이 바스락대는 날들입니다. 뼈가 어긋나고 더 멀리 방사상으로 팔을 벌린다. 싹이 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무엇 하나 뱉어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삼켰거든요.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패잔. 조심성 없이 이유가 모여 있습니까. 내 생각을 물을 때마다 내 생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능이 모여 신음할 것이다. 마침내 얼굴을 뒤덮어버리는 똑같은 입김

 

 


 

 

이수명 시인 / 양송이 수프

 

 

 양송이 수프를 만든다. 만드는 중에 그가 들어온다. 곳곳에 비가 오고 있어, 그가 말한다.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신문지에 싼 무엇인가를 현관에 내려 놓는다. 무엇이냐고 묻는다. 별거 아냐,

 현관에는 어지러운 책들, 쓸모없는 책들이 폐품으로 놓여 있다. 여러 번 읽은 책이 있다. 밑줄을 그은 책이 있다. 비 오는 날 주머니에 넣어 오다, 라고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책도 있다. 신문 뭉치가 책이냐고 물으니 그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물속에 있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느릿느릿 말한다. 전국에 비가 오고 있어,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어,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를 바라보고 창문을 통과해 들어온 비를 바라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번져가는 이끼를 바라본다. 수프가 잔뜩 부풀어 오른다. 크고 넓게 휘젓는다. 그가 물에서 걸어 나오기를 바란다. 물을 닦기를 바란다.

 그는 내 옆을 지나가고 내 앞을 지나가고 오늘은 다른 사람 같다. 집안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 현관에 폐품이 놓여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지러운 책들을 넘다가 발을 잘못 옮겼는지 모른다. 어제와 다른 날씨 때문인지 모른다.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어, 모터 소리가 계속 들려, 그는 다짐하듯 말하고

 나는 수프를 식탁 위에 올린다. 그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풀어보지 않은 그 신문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2023년 <문학사상> 5월호 발표

 

 


 

 

이수명 시인 / 오늘의 자연분해

 

 

​ 비가 짧게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넓은 구름이 왔다. 우리는 구름을 거의 보지 않았다. 보았을 수도 있다. 구름 전선은 발달하고 발달하고 발달을 멈추고 북상 중이었다. 구름은 수시로 바뀌었다. 구름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근심하는 동안 구름이 사라졌다.

 상설 할인마트 앞에 한 노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뼈가 드러나 있는 상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조각상을 피해서 갔다. 나는 노인의 편을 들었다. 뼈가 점점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걷고 있었다. 짧은 비에 땅을 뚫고 올라온 지렁이들이 번들거렸다. 지렁이들은 비킬 줄 몰랐다. 헝클어진 지렁이들 사이를 통과하고 통과했다. 하루하루를 통과해서 하루하루의 투명한 비들이 깨어지고 우리는 걸어가면서 노인이 되었다. 구름 조각을 들고 서서 노인이 되었다. 구름을 놓쳤다. 노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뼈가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는 타지 않았다. 차량이 뜸해졌다. 무엇이 우리를 앞으로 떠밀고 있는지 우리는 오늘보다 앞서 있었다. 오늘은 자연분해되고 있었다. 발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단추를 채운 것도 같았다.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도블록이 새로 깔린 곳까지 왔다. 뭘 생각하고 있니, 네가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구름 한 점에 대해서

 

-릿터 2022년 12/1월호 발표

 

 


 

 

이수명 시인 / 장위동으로 갔다

 

 

종일토록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안심하고 일어나 신체의 운동으로 도망쳤다.

걷고 걸어 장위동으로 갔다.

 

계속 벽에 부딪쳤다. 이러다간 내가 벽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작은 충돌에도

건물들이 움직였다.

골목들이 움직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공이 발 앞에 떨어져 굴러갔다. 공을 찾으러 나타나는 사람은 없고 둥글게 발달한 검은 머리들이 더 검은 잠을 찾는 듯 떠갔다. 머리들은 이미 잠든 건지도 몰랐다. 잠에서 잠으로 옮겨다니는지도 몰랐다. 무엇도 잠에 자리 잡을 수 없고

 

잠에서 깨어나 울 수 없다.

 

일렬로 늘어선 상가에는 철 지난 옷들이 아무렇게나 걸린 채로

신체의 방향에 만족하고 있다.

불과 몇 초 만에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는 이 외출에 만족했다면

더 이상 신체의 반응을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머리가 떠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멈추어 서서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벽을 휘두를 것처럼. 벽보다 먼저

건물들이 움직였다.

골목들이 움직였다. 검은 머리들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다.

벽을 볼 때

나는 내가 어디를 보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이수명 시인 / 창가에 서 있는 사람

 

 

 그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의 사람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아무 창가에 서 있고

 

 창은 네모난 창 마주 보는 변의 길이가 같은 창 마 주 보는 각들이 평온한 창 거꾸로 세워도 똑같은 그 러나 오늘은 전보다 조금 넓어진 듯 보이고

 

 안녕,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안녕, 대답 하고 요즘 좋아 보여, 하면 요즘 좋아, 똑같이 말하고

 

 거기서 뭐해?

 

 걷는 상상을 해

 

 창밖으로는 차들이 지나가고 차들이 불을 켜고 환하게 지나가고

 

 뛰어내리는 상상

 

 그러나 창이 곧 사라져버리고

 

 


 

 

이수명 시인 / 주기적 여름의 교체

 

 

 여름이 왔을 때

 나는 일을 그만두려는 중이었다.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쉬고 싶어

 

 아침에는 읽던 책의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고 저장했던 파일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왜 이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긴 그림자가 둥둥 떠다니는데

 거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고

 오픈한 상가의 스카이댄스 인형이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었다.

 

 남은 5월의 날들과 6월의 날들 7월의 날들을 세어 보았다.

 빛이 한 나무에 도착해 붉은 이파리 초록 이파리 은빛 이파리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빛 속을 날고 있는 벌레들은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여름에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는지

 공중에 지체하는 시간이 늘었다.

 

 공중에서 또렷이

 해가 멈춘 것 같은 여름

 여름에는 죽은 자들도 모두 보였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주기적으로 여름이 와서 이번 에는 좀 간단하게 자유 여행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건물의 유리를 교체하는 사람들이 유리에 붙어 있었다.

 유리를 붙잡고 빙빙 돌고 있었다.

 

 모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이수명 시인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 국문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를』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2001년 박인환 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 문학상, 청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