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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을 시인 / 나의 오른쪽이 왼쪽에게
어둠 속 여섯 개의 이랑을 넘나드는 레퀴엠, 음률은 불면이 시작된 나의 고향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불온한 몸의 시작이다 하나였으나 다른 두 개의 몸 왼쪽이 오른쪽에게 인사한다 안녕!
오래 병이 든 나의 오른쪽 우울한 밤의 피가 혈관을 흘러 각질로 뒤덮였다 검은 옷을 입은 악몽이 어깨를 깨워 불온한 소식을 갖고 왔다 밤의 통증이 은밀하다
아름다운 쌍생아 나의 왼쪽이 뒤척인다 괜찮아? 묻는 질문의 하루,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왼쪽과 말을 닫아버린 오른쪽의 입은 백지다 캄캄한 어둠이다 금지된 노래다
질문은 질문일 뿐이어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턱을 괸 나의 왼쪽이 오른쪽에게 묻는 동안
허공에 말을 배운 앵무새가 안녕하세요, 를 반복하고 있다 수족관에 불고기가 날고 지느러미에 입이 달린 불고기, 오른쪽의 눈을 닮았다.
나의 오른쪽이 통증을 앓는 불온한 꽃의 전주가 울린다 혼자 노는 불고기, 수족관은 둥근 원형이다 불고기는 말 없는 왼족으로만 돌고 있다
이가을 시인 / 목련
지체 놓은 집 담장 너머 소복을 한 청상과부 봄바람 불 때마다 시린 숨 토하더니 앙가슴 쥐어 저녁나절 홀연히 옷고름을 풀었다
스르륵 아, 뽀얀 살결 어둠을 밝혀 내일이면 벌써 소문 무성할 터.
이가을 시인 / 알과 새장, 낡은 구두의 신드롬
누가 신었나 낡은 구두에 노란 달 잠들어있다 발의 모양, 낡은 구두 새장 푸드덕, 날개의 외침 끼루룩-울음우는 새의 일생이 알에서 날개까지 담겨있다 지금은 무덤이 되었지만
앞으로 뻗은 부리와 발톱을 심은 세 발과 동그란 눈과 날개의 시간들이 살아있다 새의 운명을 쥔 낡은 새장의 문,
굳게 잠긴 자크를 열면 푸른 봄의 시절 일생의 시간들이 다닥다닥 흰뿔처럼 돋아나 언제 박제가 되었는지
어둔 저녁이 빌려온 의자에 새장을 놓았다 단단한 알의 껍질, 탄생 이전의 알의 세계가 크고 둥글다
-시집 <슈퍼로 간 늑대들>에서
이가을 시인 / 아버지의 종이밥
땅거미를 살라먹고 낮 동안의 기억을 지우던 어둠이 불빛아래 그림자를 키우는 밤
문풍지 뎅그렁거리는 날갯짓에 등잔불 꺼질 듯 휘청거리고 거칠던 숨결이 잔잔해진 뒤라야 어머니 깊은 잠에 든 시간
고요함에 길을 물으며 은밀히 펜 길 내던 아버지 미색美色의 여인과 지면紙面을 달리다가 끝내 붉은 감옥에 갇히셨다
어둠을 깨물며 댓잎을 흔들던 바람도 아버지의 한숨소리 들으며 꽃잠에 들고 동창東窓이 푸르도록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가슴으로 풀어내던 시간도 외면할 즈음 어깨 처진 아버지만 쉰밥처럼 푸석한 얼굴로 구깃구깃 허기 진 종이밥을 푸지게도 지어놓으셨다
그런 날 아침, 붴의 어머니는 종이밥으로 조반을 지으며 "그래도 네 아버지의 옆자리가 아랫목이다"하시며 아궁이 불빛보다 더 환히 웃으신다.
이가을 시인 / 월남치마 입은 호랑이
-떡 한 개 주면 안 잡아먹지 세종문화회관 앞, 할머니가 호랑이 얼굴 상표 붙은 붉은 색 장갑을 팔고 있다 -전 가진 것 없는 시인인걸요 떡 대신 내민 오래된 시집을 할머니가 팽개친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집에서 글자들 쏟아진다 낱말과 이미지 뒤섞인 자음모음들 문장을 장식했던 수사들 세종로 대로변에 흩날린다 우물처럼 깊은 생활의 잠언들 슬금슬금 책 페이지를 빠져나가 낄낄대고 도망친다 얇은 시집 목차의 굵은 활자들 이음새 빠져 덜그럭거린다 굵은 바탕체로 '생활의 잠언'이라고 쓴 표제는 말 귀퉁이가 닳아 '담언'이 되었다 -어떡하죠? 드릴 게 없는데 -너를 잡아먹지 붉은 호랑이표 장갑에서 발톱이 자라고 어흥, 송곳니가 튀어나온다 바구니에 있던 수많은 호랑이 얼굴들 어흥어흥 바구니 바깥을 나온다 이름 없는 시인인 나 무지가 된 시집 옆구리에 끼고 울긋불긋 식당 간판 늘어선 광화문 뒷골목을 빠져나간다 어흥어흥, 월남치마를 입은 호랑이가 따라온다
이가을 시인 / 일출
밤새 시작된 진통이 어둠을 베어 먹고 지친 새벽을 끌며 온다 조바심에도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간절히 바라만 볼 뿐, 초심을 돌아보게 하는 해산은 늘 엄한 아버지 같다
옥양목 찢는 소리에 핏빛 양수가 후끈하게 몸을 적신다 새 생명 보일 듯 꿈틀 이더니 순식간에 쑤욱 올라오는 붉은 기운 빠알갛게 잘 생긴 뜨끈한 놈을 보며 산모에게 미역국 한 사발 먹이고 싶다
뽀얀 젖무덤 같은 구름을 이고 어둔 갯내를 털며 날아오르는 갈매기들 은파금파 오늘도 맑음이다
이가을 시인 / 빈 배2
바람도 강도 술렁이던 날 홀로 호올로 강변에 닿더니 목새, 흙이랑 위로 넝쿨손 뻗어 제 몸을 묶는 외로운 이파리 하나
일어선 물비늘에 밀려온 어둠이 웅크린 뱃전을 쓰다듬고 강물의 움푹한 눈자위로 거꾸로 잠긴 산이 말뚝잠에 들었다
밤 지나 내려온 달 이야기 받아 적다가 그예 다 적지 못한 사연들은 마저 가슴에 끌어 안는다
허우룩해서 수척한 빈 배는 아픈 이별에도 좀처럼 제 설움을 말하지 않는다
다 주지 못해 서럽던 사랑이 안타까이 주억이고 빈 배, 퀭한 눈망울만 어둠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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