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병길 시인 / 도배일기12-제비다방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강병길 시인 / 도배일기12-제비다방

강병길 시인 / 도배일기12-제비다방

 

 

오래된 다방 간판은 제비

한쪽에서 도배를 시작해도 손님을 받는다

연탄난로 옆에 지정석처럼 모인 노인 서너 분

올 겨울잠은 이렇게 보내시나 보다

 

인경을 녹이는 영감님 옆으로

맞잡이 노릇의 여자가 스푼을 빨며 다가가고

팽주의 인물도 차맛을 다르게 한다고 벌써 입가에 버캐를 묻히며

쌍화차에 계란이 유정이냐 무정이냐 시비붙이다 꽃이

나비처럼 날아가니 쩝쩝 입맛 다신다

 

얘기는 병아리 감별로 흐르고 아롱아롱 아지랑이 피던

봄날 검버섯 없을 때 송화로 만들던 다식 얘기로 흐르다

환갑잔치 하던 시절 다과방의 끗발이 저 마담 보다 높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다

다과방이 줄어 다방이 되었다고하는 대목에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나저나 제비가 봄이 와도 잘 안 보인다고

시력이 자꾸 흐려진다고

 

 


 

 

강병길 시인 / 곁

 

 

골방이거나 광장이거나 함께 한다면

기댈 수 있는 가까운 막

 

단단함이 물렁함으로 차가움이 뜨거움으로 다가가 깃들며 완충이 되고 온기가 되는 흐름으로 세워지는 막

 

눈빛으로 미소로 마음으로, 불안으로 머무르지 않도록

여리지만 내어줄 수 있는 막

 

때로는 장막으로 때로는 연막으로 두텁게 또는 투명하게 언제나 세울 수 있는 막

 

진심을 떼어내 모두 나누었다 해도 어느 새 채워져 바닥이 없는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막

 

미끌림이 닿는 곳에 미끌리는 대로

정한 바 없으나 스스로 마는

모나지 않게 다다르는 곁이라는 말

 

- 계간 시전문지 <포지션> 2019년 여름호, 신작시,

 

 


 

 

강병길 시인 / 벽 - 도배일기 45

 

 

미래는 벽에 막혀 있다고 말한 미래학자는

벽을 모른다

벽이 있어야 앞날이 있는

도배장이의 미래를 모른다

 

면벽 십 년의 관절염과

면벽 이십 년에 얻은 허리통증과 친구가 된

도배장이의 앞을 막고 서 있는 것은 벽이 아니다

그것은 밥이다

 

지금도 쌓아올리고 허물어지는 벽은

도배수도의 도량이며 성지다

백팔 배 하듯 붙이고 천 배 하듯 붙인다

새벽밥 먹고 붙이고 때론 야간 작업등 켜고 붙인다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 벽이라면

붙인 곳에 몇 번이라도 붙인다

 

미래의 벽을 미리 알기 위해 일하는 도배장이도 없지만

안다고 피해 갈 수 있는 벽도 없기 때문에 붙인다

눈앞의 벽에 마주 서서 훓어보고

당당하게 맞서면 그뿐이다

 

 


 

 

강병길 시인 / 들풀

 

 

집 뒤편 텃밭에는

비가오고나면 늘

수많은들풀들로 뒤덮힙니다

뽑고 또 뽑고 아무리 뽑아도

들풀은 늘 그대로인듯

돋아납니다

 

지금 내 마음의 텃밭에도

당신 향한 그리움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뽑고 또 뽑아도

끝없이 올라오는 들풀처럼

그렇게 돋아납니다

 

 


 

 

강병길 시인 / 엄마 손 순두부집

 

 

간판 가게 김사장과 만나면

간판의 수명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물론 간판의 내구성이 아니라

사용시한에 대한 이야기인데

대략 구 할은

짐작대로 진행되는 편이다

의뢰인과 몇 마디 나누어보면

도배장이도 대충 느낌이 온다

 

식구들 입맛이나 맞춘다고

덜컥 간판을 단 순두부집

싼 재료로 판갈이만 해준 간판집 사장과

싼 벽지로 색깔만 바꾼 지업사 사장이

개업 답례로 순두부를 먹었다

 

입장이 바뀐 손님으로

둘이 앉아

둘만이 앉아

퍽 오랫동안

퍽 어색하게

섬처럼 떠다니는 순두부를

아껴 먹었다.

 

 


 

 

강병길 시인 / 물음표

 

 

 순례자들은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에 자리 잡았던 말

 

 손가락을 사용하여 문자를 기록하던 시절, 몰라서 누구에게나 물어보거나 상대가 아는지 되물어 볼 때도 사용하였다

 강의실에 사람을 모아놓고 지식을 밀어 넣거나, 물건의 값어치를 계량하거나, 심지어 사람의 됨됨을 투표라는 제도로 알아볼 때도 쓰였다

 

 오리 머리처럼 휘어진 기호는 태생적으로 무엇이든 파헤쳐 보려는 의구심을 본뜬 기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음을 낳았으므로 답변은 늘 궁색하였기에 직선을 갖지 못한 모양새였다

 

 신성의 크기, 충성의 크기 등 무형의 크기를 궁굴리던 시절의 물음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마침표와 이어질 수 없으므로 물음표는 본성에 충실한 기호다

 

-시집 <소리가 다른 책>에서

 

 


 

 

강병길 시인 / 코뚜레

-도배일기 28

 

 

대한 추위는 이름도 춥다

소나무가 무거운 눈 이고 있는 동네 진밭도 희고 한우콧김도 희다

우사 옆의 안채로 들어서니 현관문 위에 코뚜레가 걸려있다

오늘은 이 집에 고삐를 맨다

 

구유에 유리 얹은 다탁에서 커피를 마시며 부위별로 집을 나누어 본다

안창살 같은 안방 등심 같은 건넌방 할머니 방이다

 

써레질 쟁기질 벗어난 소가 틀니 빼놓고 되새김하는

길마처럼 무거워 보이는 반닫이를 버리지 않은 할머니

방을 먼저 도배하는 순서라고 선포한다

 

고삐를 풀어도 나이 먹은 소는 누울 자리를 지키고

소뿔이 휘듯 자손들은 고분고분하다

코 꿰인 하루는 따뜻하였다

 

 


 

강병길 시인

1967년 경기도 이천 출생. 2006년 <한맥문학> 시 당선(신인상). 시집 『도배일기』 『소리가 다른 책』. 현재 한맥문학동인회 이사. <사람과 시> <중원문학> 동인. 현재 강원도 문막에서 '행복한 인테리어'를 운영하고 있는 도배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