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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사리 시인 / 엔딩 크레딧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김사리 시인 / 엔딩 크레딧

김사리 시인 / 엔딩 크레딧

 

 

건축물을 세우는 일은

뼈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일이다.

연어처럼

고향을 향하여 가슴을 오므렸다 펴며

 

안녕, 안녕,

 

물살을 되짚어가며

처절하게 혹은 장렬하게

강의 방향으로 가문비나무가 쓰러지고

알래스카의 숲속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쓰러진 나무에게는 쿠키영상이 필요하다

잘 구워낸 건축물의 앞쪽 혹은 뒤쪽

웃기거나 맛있거나

 

혀끝에서 입천장으로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간다

 

100층 옥상은 흡입구일까 배출구일까

궁금중은 프롤로그일까 에필로그일까

 

잔류한 유머의 크기를 가늠해본다

 

예고편에는 죽은 물고기가 수천 마리

봉지 속을 빠져나온 쿠키를 깨물면

쿠키도 물고기도 목구멍에 덜컥 걸리고 만다

 

뼈로 집을 짓는 일은

암전 뒤에 숨은 비린내를 맡는 일이다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월간 《현대시》 2022년 6월호에서

 

 


 

 

김사리 시인 / 당신의 선택권

 

 

​ 여자는 전시실의 일부였다. 제1관은 작은 눈물방울, 기억이라는 얼룩이 부화해서 꽃송이가 되었다. 꽃대 위에서 영근 꽃송이는 신비로웠다. 제2관은 언어발달사를 중심으로 무언극이 펼쳐졌다. 첫울음이 옹알이로, 자기중심적 언어는 젓가락으로 총으로 인형의 친구로 역할 마임이 펼쳐졌다.

 제3관, 제4관은 소녀기와 청년기를 거치는 시기별 여자가, 제5관을 거쳐 부위별 여자가 전시되었다. 가장 쓸모없는 부위는 잔머리, 가장 활발한 부위는 저장장소가 불확실한 감당하기 벅찬 마음이었다. 미용실을 나서는 순간 김리사가 되고 침실에서 김세라, 직장에선 김샘이 되었다. 수업이 많아질수록 꾀꼬리는 침팬지로 변해가고 허리가 두루뭉술, 엉덩이가 펑퍼짐해 가려야 할 부위별 의상이 더욱 정교해졌다.

 제6관은 선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게임 방식. 우정을 선택하면 사랑이 울고, 부모를 선택하면 형제를 등져야 했다. 남편은 우선순위를 원했지만 언제나 넘쳐나는 일 다음 순위였다. 엄마보다는 가장을 선택하고 집을 넓히는 등 몰입도 높은 선택과 집중을 하다 보면 다음, 다음이 눈앞에 도래했다.

 마지막 관에 다다르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모든 선택권은 소멸되었습니다. 다시는 문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함구하고 자신의 귀를 책망하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 돌발행동이나 간섭 따위는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 주변과의 조화는 최상의 밑그림입니다. 돌이나 식물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 관은 가상 체험 시뮬레이션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품이던 김사리가 진품으로 인정받는 날을 기대하며 여자는 미래형 모델이 전시된 요양원을 휠체어를 타고 두루 관람했다.

 

-2023년《시인들》3호 발표

 

 


 

 

김사리 시인 / 루틴의 반경

 

 

반은 진담 반은 농담

스파링 상대가 되어줄래

터놓고 말하는 당신의 눈빛

밑져야 하루 이틀

이따금 불장난

 

애당초 계획은 물거품 같은 것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짓말은 함정

알고 보면 운명이란 인생의 루틴

실패 따윈 곡마단의 재롱쯤으로 생각할까

 

불운과 행운이 겹치는 지점에서

무용담은 발생하지

허풍과 풍선을 구분할 타이밍이 필요해

 

긴 고백은 사랑의 필사본이고

짧은 연서는 불륜의 실사본이라면

목이 긴 기린은 사랑의 변주곡일까

 

열매는 맛에 빠진 사람을 길들이는 것

잎과 줄기를 나누며 파국을 향해 다가가는 것

허상과 실상 가운데 있는 자신을 확인시켜 주는 것

 

열매가 썩어 진물이 흐를 때까지

완벽한 미각을 향하여

뱀이 우글거리는 혓바닥을 뒤집어야 해

 

고개 든 밤들이 현란한 불빛 아래 춤추는 것은

종말이 다가오는 신호야

 

밑바닥까지 가 보는 건 어때

해감을 토해낸 어둠에 발을 담그고 해가 뜰 때를 기다리는 거야

달빛 그물을 던져 팔뚝만한 은어를 낚는 거야

 

물안개 걷히고 모반(謀反)이 분홍 혓바닥을 뒤집을 때까지

반복되는 밤을 건너

반전의 반전을 마주보는 거야

배수의 진을 치고,

 

- <시와 사상> 2021, 여름

 

 


 

 

김사리 시인 / 오늘의 질감

 

 

 불투명한 유리창을 건너왔다

 

 참을 수 없는 어둠이

 참을 수 없는 냉골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기어나갔다

 

 성난 여가수는 춤추고 노래했다 백댄서의 현란한 춤사위에 부딪힌 조 명이 빨강 노랑 분홍 빛깔로 번져나갔다 창틀에 앉은 먼지가 두터워지고 파란 물방울이 튀었다 연두 주황 보랏빛으로 열광하는 함성이 액자 밖 으로 터져 나와 가수와 댄서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투명 물방울이 튀었다 빛깔이 하얗게 빗발쳤다

 

 온전히 미쳐야만 카니발은 시작된다

 

 참을 수 없는 어둠이

 참을 수 없는 냉골이

 참을 수 없는 두통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온다

 

 나이프로 그은 자국에는 빛과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김사리 시인 / 우리들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귀를 당겼다 놓는다. 덜컥거리는 열차 소리는 경과음일 뿐 자리에 앉는 법이 없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성이 강한 시간은 의자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귀에 꽂힌 음악은 귓속을 간지럽히는 애인. 자, 이제부터 우리는 각자의 무료한 혈육이 되자. 군중은 내가 가진 묵음을 나눠 가진 자. 혼자 나누는 대화는 들키지 않아서 좋다. 음 소거된 액정 속으로 지구는 다시 자전을 시작한다. 출근의 고독만큼 주머니의 부피가 볼록해진다. 깜박 밀려든 파도에 졸음을 맡겨 보지만, 잠을 흔드는 음악은 지하통로 저만치 달아나고, 너를 모르고 나를 모르는 우리는 히키코모리. 타인으로 환대받을 가능성은 목적지에 닿는 순간 해체된다. 몸에 걸친 혈육을 놓치지 않을 때 하차는 완성된다. 이 구간의 사람들은 사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에서 뿔뿔이 흩어진다.

 

 


 

 

김사리 시인 / 사이프러스 단막극

 

 

밀밭 사잇길로 검은 바람이 몰려온다

나는 그 바람 앞에 서서 어디론가 가야 한다

 

누군가 그랬지

산사람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고

 

고요는 두려움 같은 것

웃고 떠들고 아무 문제없는 척하는 내 앞에서

목소리를 거세당한 애완견이 눈먼 노인을 데리고 간다

 

사이프러스나무 꼭대기에선 불이 활활 타오르고

나는 악몽이 된 재난 영화의 주인공

대낮이 고요한 도시를 헤맨다

 

우듬지 사이 둥지 속에서 없는 새의 알을 꺼내는 기분으로

오늘이 텅 비어갈 때

 

추위도 익숙해져야 친구가 된단다 얘야

한동안 우린 너무 더운 계절을 살았잖니

거기 당신

나는 대체 누구입니까

 

낮달이 저리도 밝은데

꽃진 자리

 

떠밀려 왔는지

떠밀고 왔는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던 바람이

묘지기의 깊은 눈을 따라 가버렸다

 

지금 나는

꽃과 무덤이 공존하는 시간을 걷고 있다

 

동백으로 피고

붉은 동백으로 지고

 

-《시인동네≫ 2020 4월호

 


 

 

김사리 시인 / 휴일

 

 

맨발이다

우산을 쓰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최후의 지점은 어디일까

 

비 오는 토요일

눈 오는 일요일

컵이 깨지지 않아 심심한 공휴일

종일 길거리를 쏘다닌다

 

뒤집힌 우산과 풀어진 두루마리 화장지가

골목 입구에서 나뒹군다

 

유리컵 위 유리컵

유리컵 속 하늘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 시간들이

발목에 휘감긴다

어디에선가 종이배가 침몰한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컵을 깨뜨리는 사람

비는 눈물

결국 너라는 지점에서 흘러내린다

젖은 내 눈동자 속에서 버둥거리는 나를 본다

 

목마름은 일상

저녁이 비에 젖는다

나는 누구의 우산일까

 

이쯤에서 우산을 접어야 할까

우산 안에 얼굴을 묻고 계속 걸어야 할까

 

창문 아래 어항

어항 속 금붕어가 헤엄친다

어항 밖 금붕어가 파닥인다

 

비를 걸어 잠근 우산

조금 남은 일요일을 닦는다.

저녁이 흘러넘친다

 

 


 

 

김사리 시인 / 세 번째 눈

 

 

두 눈을 지운 자리에서 손가락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손가락 끝에 생긴 눈이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해제된 약속이 풍경을 이끌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인공 시선과 눈물을 파는 상점은 뜻밖의 비밀

시선의 종류와 눈물의 농도에 따른 면죄부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울지 마. 소리에 돌아보면

얼굴을 감싼 손가락이

적당한 시야로 멀어지거나 다가오는 얼굴

 

말을 건넨 얼굴이 원하는 눈빛으로 당신은 말을 합니까

한결같은 시선의 껍질을 벗기면 마침내 원하는 눈빛이 나옵니까

 

빛을 보면 재빨리 터져버리는 눈망울들

등을 대고 말하는 습관이 전염되는 동안

창문 많은 눈을 부릅뜨며 푸른 하늘을 가리는 동안

그림자를 가진 젖은 눈빛을 더는 떠올리지 않을 거예요

 

어둠을 매만지면 심장에 쌓아둔 빙하가 녹아 밑바닥까지 쓸어가 버리고,

 

거리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시집 '파이데이' 에서

 

 


 

김사리 시인

1968년 경남 밀양 출생. 본명: 김현미. 2014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시집 『파이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