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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령 시인 / 빙벽의 약속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김미령 시인 / 빙벽의 약속

김미령 시인 / 빙벽의 약속

 

 

 도망가자는 말은

 뒤쪽에서 한 번에

 우리를 포웅하던

 산 그림자처럼

 

 다시 한 번 도망가자는 그 말은

 기다리던 눈동자가

 어두워질 것을

 예감한 당신의 겨울처럼

 

 우리의 빠르게 걸어도 너무 늦은 하산

 도망가자는 당신을 외면한 그 밤의 가로등 아래를 다시 지난다 한 발 한 발 얼음을 찍으며

 

 눈 쌓이기 전에 우리 남쪽으로 도망가자

 기다려도 오지 않을

 빙벽의 약속처럼

 

 


 

 

김미령 시인 / 새건물

 

 

 공터에 새로운 건물이 섰다.

 

 매일 지나는 길인데 한참 후에야 알게 된 건 공터를 가리고 있던 공터 그림 때문이다.

 

 새건물에는 새 직원이 들어가 일을 하고 그것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깨끗한 일

 

 새건물이 오래된 동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지 않지만 알고 나면 금방 망할 것 같다.

 

 창들이 마주 보고 있고 어둠은 벽 사이마다 비껴서 있는데 어디쯤 서 있어야 소문이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블라인드를 쳤다.

 

 온 동네가 다 빠져나간 휴일엔 한 사람이 늦도록 거기 있는지 불을 죄다 켜 놓아서

 

 새건물이 보이지 않는 골목 안에서 가려운 곳을 긁느라 혼자 시원했다.

 

 


 

 

김미령 시인 / 앞니에 묻은 립스틱처럼

 

 

당신은 한순간 공중에 붙들려 있다

 

시작이 잘못된 웃음은 그냥 찢어 버리는 게 나아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자루를 어떻게 얼마만큼 벌릴까

언제 다시 묶을까

엄마께 물어보고 싶네

 

정교한 웃음에는 바늘을 꽂을 수 없어요

얼음 위에서 아직 더 미끄러질 일이 남았는데

기우뚱거리며 어기적거리며

조금 더 머물러요

 

실패한 도입부를 분질러 땔감으로 써요

돌림노래처럼 앞니를 돌려요

옷깃에 밥풀을 묻히고 안심하며 웃어요

 

절정은 저기 졸고 있는 사람 위 꺼질 듯한 불빛처럼 깜빡이고

 

눈이 부시다면 눈을 감아요

가운데 던져 넣을 차고 단단한 동전을 준비해요

 

반짝이는 눈이 탁자 위에 다 내리고 나면

 

따뜻하게 입어요

웃음의 이후로 건너가기 전에

 

 


 

 

김미령 시인 / 복개천

 

 

 벌써 끝내려고? 하는 소리가 벽 뒤에서 들렸다.

 벌써 끝난 사람은 좋겠다. 우리 둘 중에 누가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진심 같았다.

 

 골목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는데 저 위에 끝이 없어서라기보다 끝이 이상한 모양으로 굽어 있어서.

 

 좀 더 해보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아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내려왔다.

 

 6월의 향나무가 폐가의 담장 밖으로 뻗어 나와 사선으로 높이 솟아 있었고

 저 나무 끝이 향한 곳이 어디든 두 무릎은 꼭 모으고 앉아야지 생각했는데

 그게 향나무하고 무슨 상관인지 나도 내내 궁금했다.

 

 저 향나무 때문에 나중에 여기 온 게 다시 생각나면 여기서 우리가 끝내지 못한 것도 알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게 기억날 리 없지.

 그날의 메모를 봐도 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조금 더 가니 콘크리트 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더운 김이 오르고 있었고

 근처에 목욕탕이 있다면 들렀다 가고 싶었고

 그것은 이 이야기의 좋은 전환점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길이 갑자기 넓어진다.

 

 


 

 

김미령 시인 / 우리의 장난이 우리를

 

 

우리의 비밀이 우리의 눈을 가릴까 봐

우리의 장난이 우리를 알아보기 시작할까 봐

우리가 우리의 농담을 닮게 될까 봐

달아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멈추지 않습니다

돌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숨어서 더러운 사춘기를 벗기고

비열하게 낄낄대면서도

더 이상 우리는 자라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목격할 수 없는 것들이 공중에서 피를 흘리고 둥지를 짓고

증명할 수 없는 시간이 매일 아침 식탁에 오르고

우리의 새벽을 수거하려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우리는 노래를 멈추지 않습니다

모닥불을 끄지 않습니다

맛보지 않은 열매들이 부풀어 있고 만지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데

세상의 모든 바퀴가

우리가 기다리던 곳을 지나쳐서 멈추는데

지금 오고 있거나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며

바닥을 툭툭 차며 그냥 서 있습니다

어디선가 끝없이 전화는 울리는데

다정한 장난이 우리를 알아보기 시작할까 봐

우리가 우리의 혐오를 닮게 될까봐

슬픔을 알게 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죽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김미령 시인 / 중첩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손 모양에 관심이 많다

입구에 서서 대답을 꽉 움켜쥔 자의 굳어 가는 표정 같 은 결심 같은

낯선 풍경이 문득 익숙해지고

 

씻은 물을 본다

씻은 물속에 씻을 물이 남아 있어서 씻을 얼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끝났다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뉘우침이 부족하다

 

사용감 있는 구름과

사용감 있는 바람이 있다

누군가의 귓가를 스친 적 있는 숨결로 오늘은 창을 스친다

 

오늘 그녀의 눈동자는 어제 그의 귀

어제 그의 단추

그가 한 줄기 담배 연기로 날아가던 어깨 너머의 공중 장소와

목소리가 달라도 그들의 입 모양은 겹쳐진다

겹쳐지다가 다시 어긋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끝없이 앞으로 나온다 제 순서가 되면

더듬거리던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뒤로 가 버린다

같은 동작을 반복해도

언제나 모르는 표정이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는다

씻은 물속에 얼둘을 두고

 

손으로 휘휘젓고 있다

 

-시집 『파도의 새로운 양상』에서

 

 


 

 

김미령 시인 / 쳐다보는 쪽으로

 

 

꽃모자를 만들어 썼어요

삼단 케이크처럼 높은 꽃모자를

색색의 꽃을 층층이 꽂아 목을 휘청거리며 우린 걸어갈 거예요

갈대 다발로 된 튼튼한 목뼈 위에

웃는 머리를 실어 나릅니다

 

아슬아슬 빛나는 미인이 될 거예요 모자 위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고

모자 위에 개를 키우고

아이들과 물장난하며 모자 위를 뛰어다닐 거예요

 

쳐다보는 쪽으로

 

꽃잎을 뿌리며 갑니다

죽은 새로 저글링하며*

머리로 북을 치고 귀에 나팔을 꽂고 지나갑니다

나팔 끝에는 파리들이 붐비고 있어요 빛나는 맨발로 돌밭을 걸으며

오랜 순결을 학대할 겁니다

 

구경하던 등들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울던 아이는 목젖만 남아 미아가 돼 떠돌고

한껏 부풀린 솜사탕은 묘지 옆에 꽃나무로 서 있습니다

 

모자는 뒷산을 엎지를지도 모르지만

미래의 식탁으로부터 모든 과일을 빼앗아 울퉁불퉁 이상한 모습으로

비대해질지 모르지만

꽃잎은 점차 시들고

벌들이 성가시게 눈구멍과 콧구멍을 들락거리겠지만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걸어갑니다

마을을 한참 지나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모자에 불이 붙고

 

모자는 우아하게 걸어갑니다

 

강물에

그을린 원통형 머리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 송승언.

 

—《시인동네》2017년 6월호

 

 


 

김미령 시인

1975년 부산 출생. 부경대 국문학과.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파도의 새로운 양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