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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도훈 시인 / 발목의 계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이도훈 시인 / 발목의 계층

이도훈 시인 / 발목의 계층

 

 

 발목이 아픈 사람이

 하루를 쉰다, 쉬는 내내

 발목에서는 욱신거리는 일기예보가

 등줄기에서는 미끄러지는 강수량이 누적되었다.

 

 자신이 자신의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쯤이면

 발목은 도망칠 궁리를 할 것이다.

 

 나귀는 발목이 아플 때

 절뚝거린다, 절뚝거리며 쉰다.

 갈 때라는 말과 올 때라는 말 중

 어느 쪽 말에는 가끔 짐이 없을 때도 있지만

 등짐이 휘청, 들어간 발목

 헛디딘 저의 몸이 삐끗, 들어간

 두 발목은 계층이 다르다.

 발목이 없는 꽃들, 등짐이 없는 뱀들

 너무 발이 많아 어떤 발목이 아픈지

 찾아내지 못한 다족류들

 

 맨발로 지구를 돌던 인류가 대지를 차지하고 말과 관습을 바꾸어 놓은 것도 다 발목의 고통 때문은 아닐까. 저의 몸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 존재들이 있지만 편자를 갈 듯 신발을 갈아 신어도 온전히 무게를 버티고 서야 하는 발목.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는 오로지 발목의 몫이었다.

 

 방바닥에 누워 발목을 쉬는 사람

 빈 등으로 발목을 쉬는 나귀

 거대한 무게들과 등짐들이 태연하게 기다리는 날들을

 걷는 발목의 계층인 나의

 오늘의 걸음이 어제치를 또 갱신했다.

 

-『문학과창작』 2022-봄(173)호

 

 


 

 

이도훈 시인 / 증명

죽어가는 것들

증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살짝 기울어진 지구를 몸에 넣은 사람들

그 지구살이가 끝나간다고

허리를 굽혀 증명하는 것이다

어제를 만질 수 없는 일

끊임없이 한쪽 방향으로만 돌고 있는

지구를 증명하는 일이다

내일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오늘도, 현재를 증명하고

점점 더 먼 곳에서 다가오는 별들

앞으로 넓어지는 우주를 증명하려

태양의 반대편을 달려

오늘도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이전 것을 기억하지 못해

윤회는 그저 지나간 것일 뿐

다가올 천국도 지금은 기억해 낼 수가 없는

66.5 도가 기운 단지 저편의 세상

아직까지 눈 밖의 일들이 순리라는 것

모든 증명에는

온갖 일들이 뒤섞여 있다

돌 속에도 깊은 물 속도

대기권 밖의 암흑에도 무수한 증명들이 있다

증명 연결 고리라고

인간을 정의 한다

 

 


 

 

이도훈 시인 / 사과의 채굴

 

 

한 입 베어 먹고 잊은 사과에

개미 떼가 붙어있다.

뜨거운 햇살이었다.

 

하얀 속살을

침이 흐르도록 베어 문 기억이 선명하다.

그새 사과는 꽤 많은 양의 채굴을 당한 듯 헐렁 해졌다.

한쪽 무게를 잃은 지구 내부의

표본 같은 모습이다.

 

사과은 얇은 껍질에 둘러싸인

달콤하고 신맛 나는 지층

햇볕의 각도를 재는 시시가각의 각도기쯤 될 것이다.

아직 익지 않은 파란 쪽은

햇살을 피해 숨은 달의 뒷면 같은 곳이다.

 

끝까지 먹어치우지 못한 것들엔

저렇게 검은 색이 묻는다.

껍질이 허물었으면

그 알맹이를 남기지 말 일이다.

 

사과는 여름 내내 태양을 채굴한다.

그 일로 태양은 가끔 흐린 날이 되기도 한다.

그런 사과를 채굴하는

잡식의 존재들이 있다.

 

 


 

 

이도훈 시인 / 칼등

 

 

가끔 배는 등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날카로운 면으로 자르는칼은

사실 칼등의 힘으로 두 동강을 얻는다.

쉽게 나누어진 것은 칼날만 보았겠지만

시퍼런 칼날을 품고 버틴 것들은

칼등을 볼 수 있었을 것,

갈라진다는 것은 쉽게 나누어지는 족속들

어쩜,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어도

칼등의 위협으로 분열하는

세포와 같은 것.

 

우리는 칼등에 앉아 있는,

칼날쪽으로 옮겨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존재들

결정짓는 것은 칼날이지만

선뜻 칼날에 설 수 없는 시야視野 같은 것.

 

쉽게 얻어지는 답들을 보며

등을 다시 한번갈아가는 것.

등 뒤를 넘겨보던 호기심이

근심스레 연명해가는 줄타기 같은 것.

 

칼날이란

칼등의 비스듬한 양보이고

늘 칼날 쪽으로 미끄러지는 중이다.

모래가 비스듬한 해안을 따라 미끄러지고 쌓이듯,

잘 여문 바람이 늦가을 매달린 것들을 옮겨 다니듯,

날카로운 결정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다

 

등을 밀어 올리는 배부른 질문들은

배고픈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도훈 시인 / 최대한이라는 처방

 

 

의사들은 최대한이라는 낱말의

처방전을 쓴다.

중세에도 의사들은 최대한이라는

처방전을 즐겨 썼다.

 

"페스트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세요."

 

옛날엔 내 주변에 모든 최대한들이 밀집해있었다.

먼 곳에 있는 최대한들은 모두 소문으로 치부되었다.

확인할수없는곳과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얼큰한 저녁, 멀리사는

최대한 깊은 곳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근래와 어제오늘로 걱정하는 나에게

자신의 병을 옮을, 옮길 사람도 없다고 했다.

최소한을 가졌던 그는

최대한의 처방을 늘 갖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늦게 돌아올 것이다.

 

최대한을 왜 많다고만 생각할까

최대한 먼 곳 없는 곳

돌아오지 못할 곳

최소한의 숨이

최대한의 일생을 결정짓는

그곳.

 

 


 

 

이도훈 시인 / 폐가

 

 

뼈만 남은 동물의 주검은 앙상한 폐가다.

개우물과 작은 풀숲 사이에 있으니

옛말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다.

'ㄷ'자로 앉힌 풍수로 보아

사방을 겁박했던 종(種)이였을 것이다.

가운데 풀꽃 몇 송이는 정원이고

부드러운 숨이 드나들었을 들창은 문살만 앙상하다.

갈증 난 개울이 모든 물기를 짜내어 갔다.

적막한 오지,

오지는 스스로 물러선 듯 보이지만

바람과 기후의 출입이 잦았다.

뼈는 몇 세기 전 비문처럼

지구의 중심으로 숨어들려 한다.

작대기로 건들면 받침들이 흐트러져

죽음의 변명마저 사라질 것 같다.

문지방 사이를 떠돌던 극명한 상형,

아직 꼬리가 달린 집은 한 획을 추가하였다.

입은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어야 하는

맹수의 사명을 지켰다.

연기를 끊은 굴뚝에선 파란 풀 냄새가 난다.

딸린 수유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자식의 폐가는 네 발 중력의 씨앗이

잠시 머물다 가는 우주의 징검다리다.

폐가는 허물어져 가는 터만 지키고 있다.

더 깊은 초록을 뽑아 올리려는 대지가

마지막 남은 뼈의 그림자까지 도려내려 한다.

 

-시집 『맑은 날을 매다』, 《도훈》에서

 

 


 

 

이도훈 시인 / 꽃 피는 후생

 

 

살았을 적에 그는

꽃 피는 후생이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었다.

치하(致賀)와 분향(焚香)이 있을 것이라 했다.

현생은 비루할 것이라 했고

고난이 고난을 다독여

끌고 가는 나날일 것이라 했다.

 

반쯤 핀 꽃이 파르르 떨 때면

눈꺼풀이 덥석 눈동자를 삼켰다.

 

그날 이후부터

꽃 핀 자리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봄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꽃잎은 잉크처럼 번졌다.

꽃 피기 전에 구질구질한 짐짝으로 발견되었다.

끼니를 놓친 허기로 불려졌다.

가장 낮은 처우로 어느 바닥 한 곳을

숭고하게 파고들어 꽃피우고 있다.

 

모여든 사람들마다 꽃 핀 이야기만 한다면

피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의미 있겠지만

후생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진행된다.

시원한 답 한번 듣지 못하고

꽃이 피었다.

 

ㅡ『시인시대』 (2020, 봄호)

 

 


 

이도훈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 졸업. 2015년 상반기 월간 《시와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맑은 날을 매다>.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시부문). <온새미로> 동인. 화성문협 회원. 도서출판 <도훈> 대표. 시 잡지 『시마詩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