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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시인 / 겨울 허수아비
어둠이 도둑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인천 쪽으로 밀려가면 담배꽁초처럼 몸 비비며 인천행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쭈그러든 못 자국처럼 위독한 시간에 신문지를 펼치며 아직 잠자지 않고 있을 동네의 이름을 떠올리며 시려오는 발을 동동 구른다. 신도림역에서 철로는 끝도 없이 인천쪽으로 달리지만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인천행 기차를 기다리며 낯선 이름들은 담배꽁초의 연기 속에서 긴 얼굴을 늘어뜨린 채 새처럼 양팔을 파닥거린다. 깃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팔에는 인천 월미도의 물비늘이 옹기종기 모여 품안으로 자꾸만 자맥질을 친다.
-문학과창작 2001년 9월호
전기철 시인 / 겨우살이
낯설거나 낯익은 죽어가는 파리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아요. 에밀리 디킨슨을 듣고 있군요. 입을 아, 해 보세요. 고양이가 냉장고를 뒤지고 있어요. 짓이겨진 밤, 백열등을 품고 자는 밤 카프카를 읽지 마세요. 그는 장의사라고 소문났어요. 러시아 사람 블루벨 사촌인가요. 나를 입양해 주실래요. 돈이 안 들거든요. 기울어진 시를 읽는 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좋잖아요. 배고픈 고양이를 입양하든지 엄마가 몰래 이사가 버렸어요. 당신 어머니는 한 달 전에 죽었잖아요. 우리 집 고양이 말이에요. 잠은 둥둥 떠다니고 당신 얼굴이 눈물의 웅덩이 같아요. 사과나무를 심을 거거든요. 아기가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군요. 병든 늑대 한 마리 떠도는 밤 방에 갇혀 입만 뻐끔거리면 어떻게 해요. 붕어도 아니고
전기철 시인 / 바람을 보는 개는 비둘기를 쫓고
눈은 쉽게 미끄러지거든. 도브 비누가 그녀의 어깨 죽지에서 빙글, 젖는 비둘기 떼, 거품을 일으키며 창밖 십자가위로 날아올랐어. 언뜻 고래의 울음소리, 뜨거운 물속에서는 역시 냉커피가 최고야, 그것도 블랙으로, 타일 벽을 물들이는 구름 떼, 뒤뚱 뒤뚱, 파닥 파다닥, 물안개 속으로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도브도브도브, 그녀의 혀가 커피 스트로우를 도에서 솔로 빨아올릴 때 꿀꺽, 지켜보는 눈으로 한 마리 분홍빛 고래가 솟구치지. 도도도도, 물고기들이 계곡으로 미끄러져 둥싯둥싯, 물안개 속을 헤엄치는 게 낮달이었던가. 커피 칸타타를 듣고 싶어요. 물 을 뿜으며 휘익, 휘파람 소리를 내는 고래 한 마리, 하얀 포말이 핏기 잃은 엘이디에서 쏟아지고, 허우적대며 떠내려가는 비둘기 떼의 현 위로 날갯짓하는 회색 지느러미. 현기증을 앓는 고래는 무한의 공중으로 헤엄치지.
전기철 시인 / 노숙일기
가난한 밤은 길다 수녀들이 지나가고 신부들이 지나가고 골판지 박스가 오고 신문들이 오고 밤은 천천히 걷는다 소주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욕설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차곡차곡 하루 위에 몸을 눕히면 잠 속으로 발자국이 찍히고 아직 밥을 먹지 못한 영혼이 휘파람 소리를 키운다 밤은 저 홀로 깊어가고 잠들지 못한 이들의 신발은 발레를 하듯 절뚝인다
전기철 시인 / 비 내리는 영등포 시장
가을, 비가 온다. 묵은 상처들이 즐비한 영등포 시장 골목으로 비가 온다. 우울한 표정들이 불안하게 건너편 극장을 지켜보고 시장 안에 숨은 눈들이 쉬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시장 안은 벌써, 웅성웅성, 집을 찾을 수 없는 문자들이 즐비하다. 이제 곧 어둠은 배추벌레보다 조심스럽게 가슴으로 다가올 것이지만 운명을 판결하는 망치소리보다 무섭게 내리치는 빗소리에 몇몇 따라지들이 밖을 내다보며 시장 골목에 몸을 숨긴다. 빗소리에 들키지 않으려 는 속셈이다. 하지만 시장 골목은 족발과 소꼬리와 신발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몸 잃은 돼지 머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목따는 외침을 아직도 간직한 채 빗소리를 끌어안고, 구두 가게에서는 주인 잃은 헌 구두들이 왔다 갔다 시장 안 골목에 긴 사연이 적힌 발자국을 남긴다. 밖으로 비는 내리고, 슬픔인 양 긴 꼬리를 달고 도망치는 골목은 영등포 시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집 잃은 따라지들이 비를 피하며 골목을 긋고 있는 중이다.
-시집 <풍경의 위독> (2004년 세계사)
전기철 시인 / 손거울
손거울이 점점 작아져 간다. 얼굴이 붓기 때문이다. 얼굴을 좁혀 본다. 거울은 손바닥 안에서 더 작아진다. 얼굴의 면적을 좁히기 위해 이마를 베고 다시 턱을 잘라낸다. 그래도 손거울은 내 얼굴을 담지 못한다. 볼을 자른다. 그리고 코를 자른다. 얼굴은 점점 더 부어 가 잘라도 잘라내도 줄어들지 않는다. 세상의 풍경을 얼굴에 너무 많이 담은 탓이다. 내 얼굴을 담을 수 없는 손거울에는 불안한 표정만 자꾸 쌓인다.
-유심 2003 가을호
전기철 시인 / 신당동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 한다
봄비가 갈지자로 내리는 날 신당동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간다. 충무로 대한극장을 지나자 이국종 개들이 유리창에 매달린 빗방울을 잡으려고 낯선 세상을 핥는다. 개들의 혓바닥에 붙지 않는 빗방울이 저 혼자서 굴러떨어진다. 신당동은 여기에서 얼마나 멀리 있지. 동국대 앞을 지나 광희동으로 들어서는데 커피숍에서 나온 아가씨가 살이 부러진 우산을 쓰고 쫑쫑쫑 배달을 간다. 그녀는 하얀 알통 다리로 흙탕물이 튀긴 줄도 모른 채 쓰레기장을 거쳐 전파사를 지나 철물점 옆 복덕방으로 들어간다. 모든 집들의 운명이 저당 잡힌 복덕방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이다가 네거리에서 신당동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어느 쪽이지. 중얼거리는 입 속으로 빗방울이 잠입한다. 막 나온 풀잎이 기지개 켜는 가로수 아래에서 빗살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신당동을 찾는다. 하지만 신당동 떡볶이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가슴속으로 원조 떡볶이를 암송하며 빗방울 사이를 뒤진다. 우산들이 부딪는 틈새로 숨어버린 원조 떡볶이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결국 밤이 깊도록 신당동을 맴돌았지만 신당동 떡볶이집은 보이지 않는다. 신당동에는 떡볶이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세차게 우산을 때리는 빗속에서 떡볶이집이 가물거렸다.
- <시와 시학> 200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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