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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연 시인 / 소리에 젖다
오지게도 내린다 삼월 한밤 내내 두터운 침묵 두드리는 푸른 빗소리 안으로 동여맨 섶 풀어내어 차박차박 적시고 있다 부풀리고 있다
꿈속까지 따라와 하염없이 수런대는 댓잎 같은 그대처럼
지금 지상은 제 소리에 겨워 우는 타악기이다
김기연 시인 / 겸상
전주명가콩나물국밥집의 주문은 간단명료하다 -콩 하나! 뒷말 뭉텅 날려버리고도 피차 통하는 뜨거운 국밥
날달걀 타닥 깨어서 넣은 반동강 난 껍데기에 날개 몽땅한 파리 한 마리 바짝 당겨 앉는다 왼손 손바람으로 허그적 날리는데 요것 봐라 금세 다시 날아와 한사코 겸상한다
나는 뚝배기에 고개 들이밀고 저는 달걀껍데기에 전심전력 파고들고
식후 돌아갈 곳이야 다르겠지만 숨 멎고 쉬는 일이사 동족이지 않겠는가
―《대구의 시》, 2022년 사화집
김기연 시인 / 산이 色 풀고 있다
살 간지르는 바람에 여민 속옷 젖히며 산이 色 풀고 있다 온몸 구석구석 연초록 게워내어 밑그림 그리고 눈길 잦은 부위에 꽃분홍 방점 찍고 있는 아, 절정이다 저 여자
김기연 시인 / 돌
돌 하나 있다 낙동강 상류가 고향이라지만 그보다 위쪽인지도 모른다 삼각 몸짓 수만 번 나뒹군 탓이리라 동그스름 손바닥 폭마저 낙락하다
그가 준 돌
자작나무 숲 검게 어둠살 번진 채 삼각 꼭지 근처 가을 첫 홍시 같은 해 이고 있다 이미 해는 어둠에 밀리고 있고 그러나 지지 않는 해
그는 없다
저 어둠 숲에 바람뼈 다듬어 집 한 채 앉히고 물소리 나를 불러내어 소근소근 발목 씻기는
김기연 시인 / 소금쟁이 꽃
눈여겨볼 만하다 문주란 그 큰 다리통 곁에 실날 같은 몸짓으로 살짝 웃고 서 있는 소금쟁이 아무도 그를 꽃이라 부르지 않았다 문주란의 커다란 흰 꽃 그 향을 찬미하느라
다 이루었다 가슴 조이며 살아몬 더부살이 그가 해맑은 꽃잎을 터트렸다 눈여겨보라 저 작은 꽃잎에 맺힌 눈물을
김기연 시인 / 팽목항
파도는 바다를 연주하는 LP 음반이다 재즈의 음표처럼 떠 있던 섬들이 해무를 변주하고, 정박한 조도 페리호가 철선으로 주조된 녹슨 침묵을 깨고 긴 기적을 긋는다 나는 해도에 표시되지 않은 그 섬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감과 상실감의 이중주를 듣는다 출항 시간이 가까워지고, 사람들은 여객선에 먼저 오르려 선착장으로 몰려가지만 멀리 뱃길을 닫아 건 안개는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끝내 결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맑게 트인 은초록의 하늘에 먹구름을 만들고 표를 무르며 돌아서는 나의 마음 깊은 곳까지 우뢰를 내린다 이젠 가벼움만으로 부푼 나의 빈 육신을 이끌고 다시 떠나온 거리만큼 돌아서 걸어야 한다
진도읍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 몇 척의 해경 선박이 바다를 짓치며 해무 속으로 사라진다 "무슨 일이지요?" "뭐, 시체를 찾는답디다. 3일 전 어떤 젊은 남자가 여객선에서 뛰어내렸다요. 오늘 시체가 떠오른다고 그럽디다.“
아직 인양되지 못한 채 섬처럼 부유하고 있을 그는 어디쯤에서, 표류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났을까 버스 창 밖의 바다는 악보 없는 협주를 시작한다 섬과 안개와 정박한 배들과 그와 나, 그밖에 소금기 묻은 것들과.
김기연 시인 / 부풀어 오르는 막말처럼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담고 있다.’ E. 리스의 이 격언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가 크다. 발화한 말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너에게로 가서 움트는 사랑이 되기도 하고, 둘로 갈라놓는 이별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방황하는 삶에 명약같은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에 멍이 되기도 한다. 말의 힘이 그렇다. 그러니 대개는 그 말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실수로 발화된 말일수록 그 생명력은 질기다. 어느 여자시인이 갓 등단을 하고 신문사에 들러 인사를 하였단다. 마침 그 신문사엔 그 당시 문단의 산맥으로 여기는 대선배 시인이 계셨는데, 단걸음에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거였다. 반갑고 한편으론 떨리기도 했으리라. 그녀가 말했다. “어머, 선생님도 서정시 쓰세요?” 무어라 답을 했단 말은 알려진 바 없지만 생각건대 무척 난감했으리라. 그 후 가까운 시인들이 만나면 반갑다는 말, 잘 지냈냐는 말, 보고 싶었단 말을 대신하여 ‘어머, 서정시 쓰세요?’라 한다. 그러면 이런저런 웃음으로 그간의 안부가 별안간 통하기도 한다. 말의 생리에는 격이 있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라고 하니, 마음이 순결한 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 위해서라도 형식으로 철갑을 하고 말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말 중에는 그 격을 거부하는 막말이란 게 있다. 막말은 천하다고들 인식한다. 그러나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반가운 그 마음을 전할 때 격식을 갖춘 말보단 걸쭉한 막말이 더 큰 기쁨을 전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기막힌 막말이 있다.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시인의‘토막말’일부다.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막말이 있는가. 속에 것 다 태우고 마지막에야 토해내는 그 막말같은 간절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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