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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승리 시인 / 습관성 겨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장승리 시인 / 습관성 겨울

장승리 시인 / 습관성 겨울

 

 

 가려워서 긁는다 긁다보니 긁는다 가렵지 않아도 긁는다 눈보라처럼 버짐이 일어난다 창문을 긁고 가는 바람의 메마른 웃음을 분석하고 싶은 밤 네가 내 앞에 서 있다 거울을 통해 자기 등 뒤를 살피던 고양이의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는 너 네 앞에서 나는 왜 거울인가

 

 쳇 베이커의 이빨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없는 이빨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는데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나지막이 읊조리는 쳇 베이커를 뒤로한 채 긴 머리카락 같은 겨울밤 사이를 헤집으며 그의 이빨을 찾고 있다

 

 책장을 깨끗이 정리해 준 후 위스키 한 잔을 정종처럼 데워 달라던 너 정종 잔을 찾다 네 차가운 이마를 찾다 깨 버린 꿈 꿈에서 흐르던 눈물이 베개까지 번져 있고 나는 문득 눈물이 녹슨 열쇠 같다고 생각한다 눈발이 날린다 눈 위에서 늘 맨발이던 너 내 옆에 너는 있는데 네 옆에 나는 어디로

 

*너 없이도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 쳇 베이커의 동명의 곡에서.

 

 


 

 

장승리 시인 / 물새

 

 

우리의 이별은

요지부동의 숲

스치는 바람은

슬픔의 둥지

모든 이유를 거두고

가라앉는 날개

이제는

물속에서만 사랑할 수 있다

 

-시집 <반과거>에서

 

 


 

 

장승리 시인 / 말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장승리 시인 / 투우

 

 

너의 침묵이

나를 몬다

 

너의 침묵을

나는 몬다

 

네게도

네 침묵에게도 아닌

그냥 침묵에게

말을 건네 왔다는 느낌

그 침묵과 나누는 이야기를 네가

엿듣고 있는 느낌

수신자가 어떻게 순식간에 침입자가 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더 느리게 느리게

아파하는 느낌

너무 힘들다는

너무 길다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침묵의 등 깊숙이

긴 창을 찔러 넣는다

 

솟구쳐 올라 흐르는 피

너와 나의 매듭

 

 


 

 

장승리 시인 / 이 세상에는 오직 새밖에 없다는 듯이

 

 

해가 뜬다

 

아침이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기다린다

 

어둠보다 긴 이름으로

 

 


 

 

장승리 시인 / 풍향계

 

 

방금 전에 죽은 그녀가 일어나 샤워를 한다

그녀에게 묻는다 좋냐고

아주 좋다고 대답하는

그녀의 몸을 핥는다

혓바닥의 4분의 3이 가렵다

나머지는 오리무중

 

바람이 분다

까치가 흔들린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바람이 흔들린다

 

바람을 타라고 그녀가 말한다

나는 앞뒤로 몸을 흔든다

아니 아니 바람을 타라고 그녀가 또 다시 말한다

나는 좌우로 몸을 흔든다

아니 아니 아니 나뭇가지에서 떠나지 않고 까치가

한자리에서 계속 방향을 바꾼다

 

 


 

 

장승리 시인 / 생의 한가운데

 

너는

처음 본 절벽

떨어지는 내내 너와

눈 마주칠 수 있다니

 

 


 

 

장승리 시인 / 나

 

물이 되길 바랐니

흘러가길 원했니

바닥에 닿지 못하고 떠도는

눈물의 수심

묻지 않는 사람에게

대답하는 일

 

 


 

 

장승리 시인 / 고도 애도

어떻게 울어야 할까요

직박구리가 물고 있는 나방의 날개

그 無用의 안간힘으로

기다리다 기다리다

기다림까지 잃어버린다면

 

 


 

장승리 시인

1974년 서울에서 출생. 한세대 신학과 졸업. 2000년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 졸업.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알리움〉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습관성 겨울』 『무표정』 『반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