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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화진 시인 / 정밀의 책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1.
정화진 시인 / 정밀의 책

정화진 시인 / 정밀의 책

 

 

햇빛은 늘 강하고 섬세하단다

 

세상이 바둑판처럼 정교할 수는 없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의 나뭇잎이, 나뭇잎의 그늘이, 얼룩무늬 고양이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짐승들을 토해내고 있을 때

 

벗은 나무와 바람을 제치며’

 

- 시집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정화진 시인 / 꽃의 언어

 

 

붉은 낱말

슬픔조차 근접할 수 없는 환희의 낱말

아름다움, 수정 같은 정교한 붉음은 어떤 형식을 띠게 될까

태양의 옷들이었지

 

그래, 붉은 길을 가보는 거다

이곳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들, 낯설고 어눌했던 시간을 열고

마당에 늘어놓은 빈 토분에 제라늄 씨앗을 심고 꽃의 낱말들을 길러야겠어

냉이꽃 수레를 끌 당나귀 한 마리도 구해와야겠지

 

아이의 들판에 안개와 바람과 까마귀와 비밀의 숲과 붉은 털 여우가 있었지

넌 출생부터 꽃의 아이였어, 지하세계의 화사한 낱말들을 뿜어 올릴 줄 알았지

꽃의 설계도를 가진 채, 말의 씨앗인 너

빨간 머리 앤*

주근깨투성이 아이야

너는 자체 발광 환희의 말들이었어

이층 창가에 올리브 흔들리는 나뭇가지, 안개 그리고 구름

빈 플라워 [ Bean flower ]..., 비밀의 정원 뒤뜰에 늘 숨어들곤 하던 빨강머리 아이야

너의 말은 어여쁜 꽃의 낱말들이야

 

* 몽고메리 원작의 동명 소설, 넷플릭스 시즌3, 10부작 미국 드라마

 

 


 

 

정화진 시인 / 고양이와 폴란드 여행

 

 

 코브라, 에드워드 호퍼 씨네 고양이와 폴란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예정에 없는 일정이라 화를 내보지만 미룰 수 없는 여행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길가 간이 술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라스푸틴과보드카를 마시고, 없는 장소, 잠수.

 비가 왔다.

 

 융 박사가 눈을 비비며 지하 1층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그곳에 오래 숨어 지냈다. 삼각형의 의자들, 녹슨 청동거울이 벽 쪽에 붙어 있었다. 폴란드 가기 일정을 미룰 수 없었고, 고양이와 여행은 더욱 경험이 필요했다.

 

 여행 가방을 예닐곱 개나 사서 숨구멍 뚫기 작업을 시작했다. 소음 총처럼 고양이 울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구멍 뚫기란 쉽지 않았다. 가방을 겹쳐 넣었다. 숙소는 어디로 정하지, 날뛰는 짐승과 잠을 청할 곳은 폴란드 동물원밖에 더 있겠느냐고

 

 비가 계속 왔다. 보드카, 둥둥 떠다니는 여행 가방들, 없는 영혼들, 어두운 거리 주점들, 에드워드 호퍼와 융 박사가 동행하지 않는 여행. 우리는 3개월째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여행 계획서들을 빨간 철제서랍에 계속 챙겨두었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했다. 얼어붙은 빗길 저쪽 골목에서 꼬리를 세우고 고양이 서너 마리가 다가왔다. 언제 떠날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폴란드 식기를 사고 빵을 구웠다.

 

 호퍼 씨의 아내는 창밖 어두운 숲을 오래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튼을 열자 우그러진 창, 검은 바다와 흰 파도가 일렁였다. 어떤 방식으로 여행이 시작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위층 아이들 뛰는 소리가 울렸을 뿐

 

 우리는, 여행은, 폴란드로 고양이와 여행으로 변모해 있었고, 계획은 끝날 줄 모르고 여행 가방으로 이어졌다. 호퍼 씨 아내는 수첩을 꺼내들고 힘껏 울음을 누르고 있었다. 바다가 창 가까이 밀려들었다.

 

 없는 지하 계단을 우리는, 내려갔다. 목이 긴 여자들이 줄 지어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그녀들, 코브라, 코브라였다. 거대한 여행 가방 사이로 지친 사람들의 철제 침대가 보였고, 곧 그들은 죽음을 맞을 듯했다. 여행 가방이 차벽처럼 놓여 내려가는 계단 앞을 가렸다.

 

 우리는 여행 계획을 다시, 계속, 짜야만 했다.

 

 


 

 

정화진 시인 / 맨드라미 속

 

 

습한 그리고 곰팡이 내음 같은 것이

안에 고여 있다

손끝이 아프다 저미듯

떨려오는 어둠이 섞여 있는 방

일어나야 한다 나는

언제부터 창을 안으로 잠궈 두었던 걸까

이불은 무겁게만 느껴지고 눅눅하다

앓는 몸을 일으켜 나는

발그레 돋는 듯한 참 쪽으로 다가간다

아직도 따스하게

손끝에 묻어나는 미열을 느낀다

미열을 앓는 것은 참이었을까

 

나를 스치고 지나간

우뢰와 비 끝으로 돋아모르는 시간, 그 깊은 속

붉디붉은

 

 


 

 

정화진 시인 / 벚나무 아래

 

 

눈먼 물고기가 동굴 깊이 떠다니는 꿈을 꿀 때

파랑이 높이 이는 강물과 아득한 벼랑과 마주할 때다 그러나

지금은 타자의 시간, 떠오르는 시체 앞, 강이 추상성을 잃을 때다

 

어디까지 왔는가 그대여, 벚나무 꽃핀다고 아이가 전하고

창밖은 목련, 폭발하고 있다

동백과 목련 사이, 꽃핀 자리, 생은 무겁거나 검거나 아프다

 

노을이 지는 사막 저쪽, 동유럽 저지대* 사람들이

꽃핀 사월을 견디지 못해

송아지 다리를 도끼로 쳐내린다

벚나무 아래 도축 허가증을 내밀고 수의사가 급히 다녀간다

 

인간세상은 고기 굽는 내음으로 저녁을 장식하고

꽃을 다 게워 놓은 벚나무 가지들

그대여,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정원에 날카로운 새 떼들의 비명

 

목련과 동백이 함께 핀다 봄날 벚나무 아래

버찌, 열매들 떨어진다 쓰디쓰다 계절을 찢어 놓으며

까마귀 떼 도시로 도시로 날아든다

 

새들의 정원, 벚나무 아래 비명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대여

 

*헤르타 뮐러의 단편소설

 

-월간 <현대시> 2019년 5월호, 신작특집 -

 

 


 

 

정화진 시인 / 물무늬

 

 

징검다리를 딛고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짧은 치마의 한 아이 다리가

물가로 번지며 커지는 동그란 물무늬를 만들어낸다

골뱅이들의 무늬가 가득한 물 속

 

물무늬를 헤아리던 아이가

물 속 무늬를 지우러 물에 잠긴 바위로 간다

그러나 골뱅이만 주워낼 뿐, 무늬의 어둠을 못 보는 아이

냇물 위에 짙게 그늘을 내리는 산자락이

희고 창백한 아이의 다리를 반쯤 가린다

 

잘게 흔들리며 비치는

미류나무 잎새 사이로 골뱅이들이 기어가고

잔잔한 물 속을 다 큰 내가 들여다본다

문득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 속 무늬들이 사라지고

상류 쪽 수면이 갈라지는 것이 보인다

 

더욱 어두워지는 냇가,

기다란 물무늬 하나가 아이의 다리 쪽으로 스미듯 향한다

미류나무 잎새를 하얗게 가르며 사라지는

물뱀의 모가지

 

징검다리 위에서 내가 비칠하는 사이

그 물뱀도 냇가에는 이미 아이의 다리도 보이지 않는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징검다리 위에

채 마르지 않은 작은 물·자국들만 선명히 남아있다

 

  


 

 

정화진 시인 / 겹유리창에 구두주걱이

 

 

창이 조금 열린 것인가

무언가가 덜커덕거린다

길죽하고 투명하게 막대기 같은 것이 창 틈 안쪽으로 걸린 게 보인다

 

겹유리창 바깥 하늘은 어슴푸레

어둡다 바람이 흔드는 길이 구두주걱 바깥으로 놓여

창 틈 사이로 쉼없이 흔들리며 보인다

구두주걱을 흔드는 것은 그럼 길인가

먼지바람이 분다

 

매캐한 내음이 방안으로 쓸려온다

재나 쓴 씀바귀 같은 길이

구두주걱 바깥에 놓여 있다 검은 내음이 풀풀

날려와 창틀 안쪽에 흩어진다

보고 있다 나는 다만

안쪽에서 흔들리는 휘돌아 놓인 길을 본다

창 틈으로 마른 감나무 잎사귀도 보인다

길은 거무스레하다 누군가가 스탠드 불을 낮게 켜두고 방 밖으로 걸어나간다

구두주걱이 흔들린다

 

도포자락 같은 길

강하나 휘돌아 길 끊어질 듯 보인다............ 띠살문이 강

저쪽으로 열린다................. 구두주걱이

..............자주 옷고름 흐트러진 댕기머리의 여자가

기름진 고깃덩어리를 뜯으며 허기를 연다

벽들이 우들두들하고 기름때가 흐르는 토방 띠살문에

구두주걱이 검게 어린다

강물 위로 기름이 뜬다

 

흔들리는 구두주걱의 꿈인가............ 지게 목발의 사내가

가마솥 속에서 삶은 고깃덩어리를 건져 올린다

토방 띠살문에 걸린 구두주걱에 기름방울이 스며든다......... 꿈이 흔들린다

구두주걱의 휘돌아 놓인 길이

마궁이 속에서 길이 연기를 내며 탄다 낡은 구두 타는 내음

지게목발의 사내가 아궁이 속에 짚신 꾸러미를 던져 넣는다

띠살문 안쪽으론 흐릿하게 여자가

놓여 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창틀 위로

흔들리는 구두주걱이 걸려 있다

 

띠살문이 열린다 무언가가 심하게 덜커덕댄다

구두주걱? 여자가 끌려간다 팔순의 노인이 댕기머리 여자를 끌어안는다

길은 퀭하고 강물은 검다

 

지게 목발의 사내 울음이 쩍쩍 강가로 번져나온다

거대하게 부푼 노인의 길쭉한 길이 가득 채워지고 있는

강물 속을 사내가 바라본다

지게목발이, 부러진 구두주걱이 강물 위로 떠오른다

감나무 가지 어두운 하늘 속에

꺽인 사내의 길이 덜렁 늘어뜨려진 채 걸린다

 

겹유리창 바깥 하늘이 어둡다 구두주걱의 시간이 스며드는

 

노인은 팔순이 되도록 정정하기만 했다

사랑채로 드나드는 상 위엔 고기반찬이 더 늘어났다

굶주린 어린 종년도 잘 먹였다

그리고 그 포동포동한 댕기머리를 사랑채 장지문 속으로 집어넣었다

마당은 분주한 듯 좀 어두워지는 듯했다

 

짚신이나 삼고 나뭇짐이나 해대던 떠꺼머리 종놈의 모가지가

감나무 가지에 덜렁대며 걸린 것도 같은 날 그믐밤이었다

 

먼지바람이 인다

감나무 가지가 부러질 듯 휘어진다

구두주걱이 흔들린다 창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듯하다

다가오는 구두주걱

폐허다 짚신의 검은 재가 덮인 강 같은

감나무 가지가 부러진다 퀭하게 눈 뜬 노인이

노인이 강물 위로 허옇게 떠오른다

그믐날이었다

 

띠살창으로 먼지바람만 드나든다

마당엔 씀바귀만 무성하게 돋아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 그건 낡은 꿈이였을까.............. 구두주걱의 흔들리는

길도 하늘도 바람 같은 것에 쓸려간 뒤

방안에 낮게 불을 켜고 앉아

창 가장자리에 걸린 구두주걱을 본다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듯 낡은 구두주걱이

흔들린다 겹유리창 안쪽으로

 


 

정화진 시인

1959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칼이 확대된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현재 '오늘의 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