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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강우 시인 / 오르골의 나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2.
박강우 시인 / 오르골의 나라

박강우 시인 / 오르골의 나라

 

 

말을 타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포도알이 떨어지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터널을 빠져나와 놀이터로 달려갔다

등불이 켜진 운동화 안에

여자 아이가 셋 있었다

비스킷을 오물거리며

가시바늘이 돋아난 구름을 만들었다

포도알이 흘리는

피눈물이 터널 안으로 모여들어

말이 만들어졌다

착한 여자 아이는 흰 말로 노래를 하고

나쁜 여자 아이는 검은 말로 노래를 했다

흰 말과 검은 말이

강줄기를 따라 달리는 동안

붉은 늑대와

푸른 생선이

남은 여자 아이를 나무에 매달았다

포도알을 머금은 여자 아이는

그날의 태양이 되었다

 

 


 

 

박강우 시인 / 서바이블 게임

 

 

  그녀의 흰 살을 열고 들어가서

  남자 A는 남자 B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남자 B는 폭탄을 안고 터지며

  펑, 펑 웃는다

  "눈이 없어졌다" 펑

  "귀도 없어졌다" 펑

  눈 감고 귀 막고 펑, 펑 던지면

  남자 A가 지워진다

  그녀의 흰 살 속에 박혀

  "터진다, 터진다"

  남자 C는 남자 D를 향해 별을 던지고

  남자 D는 별을 안고 빛나며

  "별이 되어 지고 있다"

  "그녀의 흰 살 속으로 지고 있다"

  남자 D는 그녀의 흰 살을 남자 C에게 던지고

  남자 C는 그녀의 흰 살을 품에 안고

  흰 살이 되어가며

  "박혀 있는 별들이 터진다"

  "별들이 터지며 웃는다"

  남자 A가, 남자 B가, 남자 C가, 남자 D가 웃는다

  그녀는 웃지 않는다

  펑, 펑 터지며 말 없이 서 있다

 

 


 

 

박강우 시인 / 신들의 전쟁 시즌 2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배가 도착했다.

난장이들이 내렸다

칼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선 여자 아이가

물속으로 뛰어 내리려 했다

물소리를 숨기기 위해

커튼을 닫았다

난장이들은 모노레일 타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커튼이 열려 있는 집 앞에는

안개에 싸여있었다

약속된 시간을 타고

모노레일은 움직였다

울타리를 여러 번 건너뛰었다

올빼미의 눈을 가렸다

새벽은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여자 아이의 머리가

욕조에 담긴 물에 떠다녔다

여자 아이를 먹기 위해

욕조 안에서 난장이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돌아

신선한 욕조는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가을호

 

 


 

 

박강우 시인 / 연어통조림

 

 

몸이 반 토막으로 잘려 저장되는 날

머리는 숙성을 위해 반납한다

아침 6시 알람이 울리고

우리는 줄을 지어

화장대 앞에 선다

두툼한 입술을 그리고

긴 눈썹을 그리고

초록 내장을 목에 두르고

방아쇠를 당기면

머리 안에서

비빔면 레모나 카페라떼 에너지바 젤리 초콜릿 허니버터칩 치킨

아메리카노 맥주 레모네이드 콜라 핫식스는 부글부글 끓어올라 머리

밖으로 튕겨 나갈 순서를 기다린다

아메리카노와 비빔면은 17층까지

허니버터칩과 카페라떼는 8층까지

레모네이드와 초콜릿은 32층까지

콜라와 젤리는 61층까지

맥주와 레모나는 58층까지

에너지바는 혼자서 2층까지 탈출한다

우리는 아무도 1층까지 탈출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알리지 못하고

연어통조림 하나 남긴다

 

 


 

 

박강우 시인 / 나무에 못 박힌 겨울

 

 

나무에 못 박힌 겨울을 보았다

그 나무 아래를 지날 때

그 겨울은 나에게로 떨어졌고

나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달렸다

첫 번째 외나무다리를 건너와

쫓아오던 사람들이 그 겨울을 밝고 지나갔고

나는 끝까지 비명을 참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첫 번째 집 앞에서 나는 기다렸다

그 겨울을 깔고 앉아

지나온 외나무다리를 생각했다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푸르게 빛나는 집을 짓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집 속에 집어넣고

부수고 다시 짓고

부서진 집에서 푸른 뇌수액이 나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집으로 흘러갔다

 

첫 번째 다리를 부수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의 집이 무너지고

무너진 곳마다 외나무다리가 생겼다

두 번째 다리를 부수고 돌아온 사람들은

이슬 내린 거리에서 백 년 동안 잠을 자고

이른 새벽 죽은 사람들의 두개골을 안고

세 번째 다리를 부수러 떠났다

안개가 걷히면 외나무다리는 다시 생겼고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다시 달린다

두 번째 집을 향해

첫 번째 다리와 두 번째 다리와

세 번째 다리를 건너

긴 비명 속을 끝까지 달린다

 

 


 

 

박강우 시인 / 이야기

-Performance 23

 

 

새엄마가 장독대로 가서 말했다.

장독 뒤에 숨어 있던 나팔꽃이 일어났다.

 

나팔꽃을 꺾어 새엄마의 화장대에 꽂고

루즈로 나비를 그렸다.

 

나비는 장독대로 날아갔다

기다리던 고양이가 나비를 삼켰다

 

고양이의 수염에 나팔꽃이 매달려

토하지 않으면 쓰러질 거야

 

나는 나팔꽃을 안고 쓰러졌고

고양이는 나의 바지 속에 나비를 토했다.

 

새엄마는 바지를 벗기고

나의 입술에 루즈를 발랐다.

 

나는 나팔꽃이 되었다.

나는 나비가 되었다.

 

-(현대시 2000년 6월호)

 

 


 

 

박강우 시인 / 예사롭지 않던 날

 

 

 예사롭지 않던 날

 

 텅 빈 객석의 의자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노래를 들었고

 우리의 키 보다 크게 자란 수탉의 날개짓을 흉내 내며 우리는 수탉을 따라 날아올랐다

 

 불시착한 비행기들로 가득 찬 활주로에 마주 서서 우리는 처음으로 수탉이 되는 방법을 알았다

 

 수탉은 관제탑으로 올라가 텅 빈 객석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고

 파헤쳐진 활주로 아래로 내려가는 문이 하나씩 열렸다

 

 문을 따라 내려온 우리는 봄 햇살에 잘 익은 딸기를 쪼아 먹으며

 모래사장을 뛰어 다니며

 수탉이 되어 갔다

 

 객석의 의자들이 내린 뿌리는 뒤엉켜 튼튼한 활주로를 만들었고

 우리는 불시착한 비행기들을 지상으로 하나씩 날려 보냈다

 

 예사롭지 않던 날

 우리는 텅 빈 객석의 의자들이 수군거리며 뿌리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계간 『다층』 2010년 겨울호 발표

 

 


 

박강우 시인

1959년 경남 마산 출생. 1984년 부산의과대학 졸업. 의학박사.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병든 앵무새를 먹어보렴』 『앨리스를 찾아서』. 현재 계간 『시와 사상』 주간. 박강우 소아과 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