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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시인 / 허름한 옷 한 벌
고라니 선생, 옷 한 벌 벗어놓고 어디 가셨나 늦은 아침 을 서둘러 벗어나는 도로 옆에 허름한 옷 한 벌의 내력을 나는 알지
젊은 시절 그 옷은 물결을 거스르는 연어의 은비늘이었지 살과 피의 견고한 보루, 연인을 누이고 그녀의 다리 하나를 받아주던 육체의 빛나는 광채였지
누가 고라니 선생 앞에서 파란만장을 논할 수 있는가 은유로 출렁이는 그의 일생은 빛나는 옷으로 붉은 근육을 감추고 서늘한 칼집의 시절을 건넜지
드디어 발자국 선명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는 흰 눈발의 경계에서 누군가 고라니 선생의 단벌옷을 벗긴 것인데, 벗고 나면 허름한 옷 한 벌일 뿐
허름한 옷이 움켜잡은 늦가을 햇살의 체온일 뿐
김종윤 시인 / 두레박
깊은 우물 맑은 물을 힘 있게 길어 올릴 욕심으로, 기술 선생 실력으로 모양 좋은 두레박을 만들었지만 물 위에서 쓰러지지 않는 두레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바닥에서 넘어져야 비로소 물에 잠기고 속을 채워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아직도 모르고 살고 있네
김종윤 시인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포도밭 울타리를 새로 치기로 했다 늙은 아버지와 내가 지주목 어깨위로 은색의 6번 철사를 두르고 힘을 모았다 늙은 나무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직장이었다 굽은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양철 움막을 올리고 지빠귀와 물까치 떼를 쫓았다 기분 더러운 날은 늙은 동네 친구들 욕을 했다 느딴 것들 없어도 잘만 살 수 있어 누가 살아서 관을 보나 보자고 마른 고집을 틀어 짜며 움막에 들었다
오늘은 포도나무들이 고집을 쥔다 어깨를 힘써 조이던 허리께를 풀고 허리를 조이면 요란하게 어깨를 턴다 늙은 나무들의 고집이 소소리바람이다 아직은 삽날 짱짱하게 밀어내는 맵짠 봄밭에서 아버지와 나는 소심한 싸움소마냥 밭의 허리를 잡은 채 기력이 다해갔다 마침내 늙은 아버지도 나도 손을 놓고 밭 둘레의 지주목들도 슬그머니 어깨를 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종윤 시인 / 수분송 ―금강 길1
장수군 물뿌랭이마을 수분령의 수본송水分松은 금강의 발원지 신무산 뜸봉샘 맑은 물줄기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푸르게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 늙고 굽은 소나무는 갈라진 손끝마다 청바늘을 돋우고 한 줄기 샘물을 따라 바다 마중을 갑니다 뜸봉샘의 작은 물줄기는 바다를 꿈꾸는 노송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슴에 한 줄기 강을 내는 일입니다 변함없이 믿음을 주는 일입니다 금강의 여정이 바다에 이르듯 노송의 삶도 바다에 닿습니다 강물을 궁벽치 않은 샘을 근원으로 사랑은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힘으로 먼 길을 밀고 갑니다 우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통해 변함없이 깊어지는 믿음을 봅니다 당신에게 향하는 내 믿음을 봅니다
김종윤 시인 / 동냥밥 한 그릇 -금강 길3
바람 한줄기 소식 없고 햇살 뜨거운 날, 허리춤에 찬 물병 두 개를 비우고 지친 다리를 무겁게 끌며 걸어도 검은 길은 한마디 말없이 저만치 앞서 갑니다 금강 상류 유원지 왕버드나무 아래 배낭을 부리고 왼 발에 네 개 오른 발에 다섯 개 하얗게 부풀어 오른 물집을 터트리고 아픈 발보다 고픈 배가 간절하여 빈 그릇 하나 들고 밥 동냥을 갑니다 흰 밥과 김치 한 가득 그리고 뜨거운 고기도 몇 점 몸 속 길에 차곡차곡 밀어 넣습니다 밥 한 그릇의 힘이 오십 리 아침 밥 한 그릇의 힘으로 멀리 왔습니다 절실한 그리움도 없이 뜨거운 눈물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동냥밥 한 그릇에게 미안합니다 배낭을 둘러메고 신발 끈을 다시 묶습니다 한 그릇 밥의 희망은 든든하고 물병이 두 개나 있는 맑은 날입니다
김종윤 시인 / 어덕서니 -- 금강 길 9
신무산 뜸봉샘에서 내리는 금강 천리 수분령 골물은 천천에서 비로소 강이 된다 예서부터 소리를 숨기고 몸짓으로 흐른다 금강 우듬지길 걸어서 이틀, 인의를 저버린 왕은 버려도 된다면 정여립의 창긑 호령이 우뚝한 가막리 죽도에서 저린 발을 강물애 담그고 쌀을 씻는다
내일은 저 산에 올라 보리라
저문 강에 더운 몸을 식히고 강가에 눕는다 어둠이 에우고 물소리가 덮는 깊은 밤, 난분분 흔들리는 빛이 있어 자갈밭에 나서니 눈앞에 우뚝 선 검은 산 올려 볼수록 갑옷처럼 투구처럼 다가와 지친 몸을 누르고 밟는 저 거인, 자 어덕서니
서마서마 식은 몸으로 밤을 세우고 나뭇가지 사이로 햇귀가 내릴 때 강가에 선다 강물은 여전히 푸르고 맑더 층층나무 개망초 구절초 모두 평안한 밤을 보낸 표정이더 신발 끈을 묶으며 허물어진 마을의 블록을 다시 올린다 무거운 발걸음 다독여 용담을 지나 금산으로 내린다 햇살 속에 어덕서니를 숨기고 상처난 길을 걷는다
김종윤 시인 / 오목눈이 시린 발
노루귀꽃을 어르는 바람인 듯 솜이불을 달싹이는 내 님의 흘레인 듯
화살나무의 홑잎을 밟고 가는 작은 새의 시린 발을 보네
나는 햇살 아래서 그는 그늘 아래서
서로 상관할 바 없는 궁색한 살림이지만
그래도 벚꽃이 함박눈으로 내리는 날은
맨발로 쪼그려 앉은 쥐똥나무처럼 오목눈이의 탁발을 오래 마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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