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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설하 시인 / 너에게 가는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2.
김설하 시인 / 너에게 가는 길

김설하 시인 / 너에게 가는 길

 

 

벌어진 입술 속,

혀의 길이를 측정하고

발음을 고르는 혀의 움직임을

번져가는 겨울바람이 주시한다

 

너의 발은 눈 속에 묻혀있다

 

눈물 흘리지 않는 너의 깊이에다

내 무릎을 대고 너와 키를 맞추고 싶다

무릎이 시리도록 너의 주위를 맴돌다

너의 명암을 내 맘대로 조절하고 싶다

 

너의 사방을 따라 나도 사방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다

잘 헹구어진 햇살이 너의 얼굴에 얹힐 때

문득 살아나는 너의 얼굴 속에 갇히고 싶다

 

그 때 너는

차가움 속에서 삶을 끌어올리는 하나의 심지로

나의 꽃으로 살아난다

 

내가 너라는 우주 한포기 가만히 보듬어 온 날

손이 얼고

발이 얼고

입이 얼어붙었다

 

 


 

 

김설하 시인 / 봄소식

 

 

성근 산 부스스 땅이 일어나고

계곡마다 물길 열리는 소리

훈풍 끼고 봄이 당도하여

물오른 개나리가지 별이 달리면

고결한 내 어머니 닮은 목련이 피지

 

묵은가지 뚫고

수줍게 웃는 복숭아꽃

온 산 분홍빛으로 수놓을 진달래야

부끄러운 말고 어서 어서 피어서

짙은 봄소식 한 아름 안겨주련

 

들녘 검불 속

봄나물 쑥쑥 올라와

아낙네 손길 부지런해지면

오늘 아침 식탁엔 쑥국이란다

오늘 저녁 만찬은 봄 냄새란다

봄아 어서 어서 내 품에 쏟아지련

 

 


 

 

김설하 시인 / 그리움은 빗물 되어 내리고

 

 

홀로 쓸쓸히 앉아 있는 밤

추적 이는 빗소리 귓가에 고여 들더니

내 가슴에 사는 언어를 흔들어 일으켜

그리움으로 욱신거립니다

 

맑은 차를 끓여서

한 모금씩 가슴을 데우고

마음을 누그려 피르륵 웃어보지만

조바심의 눈물 동공을 메우고 맙니다

 

빗소리는 내 맘처럼 굵어져도

어둠을 벗는 새벽

그의 모습으로 가득한 내 심장은

아픔으로 잠들지 못합니다

 

새벽 공기가 얇은 어깨를 스치고

속눈썹에 걸린 눈물 말리도록

또 하루가 의미 없이 사라진

어제부터 엉터리인 가슴입니다

 

그대 잠시만 아주 잠시만 다녀가신다면

수줍은 미소 입가에 그린 채

꿈으로 이끌려 잠이 들 터인데

그대 오지 않는 골목으로 눈물 같은 비가 내립니다

 

 


 

 

김설하 시인 / 어머니의 정원

 

 

비 오는 날이면

마당 끝 놓아둔 드럼통에 차오르는

빗물만큼 행복을 채우는 어머니

흙이 바짝 마르면 줘야 해

매번 푸른 플라스틱 물바가지를 찾느라 부산하긴 해도

물주는 일에 지극정성인 어머니

소파에 앉아 졸음으로 망부석이면서

물뿌리개가 손에 들리면 무엇보다 진지한 어머니

 

연분홍 미니장미랑 껑충한 나리꽃이랑

봄내 어머니를 즐겁게 하던 작약과 백합 그리고 겹철쭉

꽃은 졌어도 색감이 특출하다고 자랑한 영산홍

더부살이하는 채송화까지 당신 손끝에서

시원스레 꽃잎을 적시며 무지개가 핍니다

 

투명한 웃음 날아오른 하늘에 꽃구름 떠가고

어머니의 작은 정원이 금세 소란해지자

마음의 창을 열어 놓고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정겹게 나누시는지

꽃보다 곱고 꽃보다 더 여린 내 어머니

제게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꽃입니다

 

 


 

 

김설하 시인 / 어머니! 당신인 듯 낮달이 따라오네

 

 

가로수 희뜩희뜩 지나는 길섶

낫자루 번뜩일 때마다 멀쑥한 언덕배기

낮달 창백하게 거기에 어리더니

당신인양 사포질한 가슴 풀무질한다

 

맘속 고였던 피눈물 쏟아도

무리진 패랭이 붉은 꽃잎의 각혈

꽃도 서러워 통곡하는 길

조팝나무 꽃눈 아프게 피어

모래알 씹는 당신 까칠한 입안에

숟가락 봉긋하게 얹어드리면 배부르실까

 

짧달 막한 들꽃 그림자 슬피 주저앉고

수양버들 늘어트린 눈물의 춤사위

작아진 당신 가슴에 기계음 펄떡이던

짧은 봄밤이 길기만 하였다

 

저도 슬퍼 창백한 낯빛

물끄러미 침상을 지키더니만

새벽녘 깜빡 졸아 제 갈길 잃어버렸나  

두고 오는 맘 지악스러워

햇살이 유리파편처럼 꽂히는

낮인 줄 모르고 따라오는 달이

당신인 듯 내 맘을 훌쳤다

 

 


 

 

김설하 시인 / 커피 한 잔의 행복

 

 

동으로 난 쪽창으로

하얗게 튀어 박히는 햇살을 맞이하며

커피 물을 얹어 놓고

물이 끓는 동안 인스턴트 봉지를 자르며

목젖이 보이도록 긴 하품을 합니다

 

머그잔에 커피를 사르륵 털어 넣고

이슬 묻은 창가에서 설핏 잠들었던 바람이

여름내 걸려있던 대나무 발을 차락차락 흔들면

팔팔 끓는 물이 잔속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뜨거운 물이 진저리를 치고

뽀얀 김이 머리를 풀어헤치면

부유하는 커피 알갱이

뿌옇게 부풀어 오르는 크림을

꽃무늬 스푼으로 가만가만 첫습니다

 

소박한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작은 보람으로 하루를 마감하기 위하여

한 모금씩 하품처럼 커피를 마시는 아침

오늘이라는 선물 행복으로 저축합니다

 

 


 

 

김설하 시인 / 그녀는 시인을 꿈꾼다

 

 

잿빛 구름이 뒤척일 때마다

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지면

미열 같은 흥분이 부르르 전신을 에워싸는 밤

제각기 눕던 글자들이 조화롭게 엉기던 찰나

복사해 두었다가 붙여 넣지 못하고 날린

감정의 절단에 허기진 위장이 들썩거렸다

 

살아 움직이던 숲의 노래도

어둠속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고요와 침묵 속에 감겨들도록

불빛 사위는 창안에 몸 부리고

허공을 향해 멍한 눈빛만 쏘다닐 뿐

사라진 언어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둠이 두터워져 갈수록

건너 숲의 실루엣 흑빛에 눌린 밤

젖은 바람이 텅 빈 동공에 주저앉기 시작하여

범람한 눈물이 고요를 일으키면

잃어버린 언어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라도

가슴에 고여 드는 눈물의 씨앗

 

갈피를 잃은 바람에

공장의 굴뚝 연기가 흐트러지고

갈잎 쏟아지는 소리 우우 숲이 들썩거릴 쯤

잿빛 구름 거닐다간 빈자리에 달이 돋아나고

아! 비상을 꿈꾸던 시절이 깨어나 등을 밝히면

망각의 숲에서 묻어온 감성의 눈물을 훔쳐

시인의 꿈을 꾸는 그녀

열 손가락 가지런히 자판위에 얹는다

 

 


 

김설하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수필가. 계간 <대한문학세계> 시부문 등단. 대한문인협회 詩부문 신인상. <한비문학> 수필부문 등단. 롯데화랑, 한비문학 초대 작가. 시인과 사색 동인. 시마을 창작소설, 수필란 운영자. (사)창작예술인협의회 정회원. 詩集 <꽃잎에 웃음을 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