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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시인 / 아마도 아프리카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를 때 나는 슬픈가 나는 위안이 필요한가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주 조금
호랑이, 그것은 나만의 것 따뜻하고 보드랍고 발톱이 없는 것
살고 있나요 묻는다면 아마도 아프리카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반은 쑥색이고 반은 곤색이다 쑥색과 곤색의 접합점은 성홍열 같은 선홍색
열두 살 이후로 농담이 입에 배었다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손톱 끝에도 주황색 양파 자루 속엔 어제의 열매들 양파가 익어가는 속도로 너는 울었지
눈을 감아도 선홍색이 보이면 다시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 너무나 멀리 있지만 아마도 이미 아프리카 나는 하룻밤 사이에도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이제니 시인 / 그들의 입
너는 언제나 회색의 혀로 회색의 목소리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오해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 이해라는 말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이후로 우린 서로에 대한 질문지를 삼켜버렸지 이후로 우린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무수한 말이 적힌 백지를 간직한 채 꿈은 반대라는 말을 괄호 속에 묶어둔 채,
새의 이름을 가진 불고기, 불고기의 이름을 가진 새. 구슬프다는 말은 날개 달린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날개와 아가미를 나누어 가진 뒤 천천히 서로로부터 멀어지고 꿈속에선 하나의 이름으로 둘을 부르는 일에 골몰했다.
소리가 노래가 되는 온도를 위해 소리가 노래가 되지 못하는 무구함에 대해 서로의 손과 발을 만지듯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글만을 쓰고
생물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시인의 문장과 검은 모자를 쓴 신원 미상의 그림자와 터널 속에 남겨진 내 일곱 손가락과 삼각형이 나를 찌르는 방식과 푸른 발을 가진 새들과 나무둥치의 상처와 소멸하는 별들과 환각의 꽃과
몇 가지 오류를 거쳐 나는 입 밖으로 귀환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의 시간은 방부 처리된 길고 투명한 유리병의 나날. 서로의 입속말을 훼손하지 않는 대신 여분의 종이는 어둠으로 물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생각나지 않는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다.
이제니 시인 /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라고 부르면 소년이 보인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인다. 세상 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꽃도 피어나는. 불도 피워내는, 자신의 숨은 광기를 걱정하는, 웃어야 할 때 옷을 줄 모르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던, 시들어버린 얼굴 위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발 물러나고 있었다. 비유를 잃어버린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도처에 도사린 어제의 구름. 불보다 붉은 오늘의 묵음.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으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두 손으로, 내가 살았던 곳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에는 네가 없었다. 소년은 소년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쓴다. 벗어나길 바라는 순간 벗어나고 싶은 울타리도 하나 생긴다라고 쓴다. 울타리 밖에서 부터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감함으로 무장한 날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착란의 찬란의 소리 없는 소용돌이 속이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세계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그림자. 죽거나 늙거나 마지막은 마찬가지라면, 잊거나 믿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천상의 음악이 흘러도 좋을 것이다. 천사가 날개를 펼쳐도 좋을 것이다. 단단한 벽 너머로 막이 열려도 좋을 것이다. 손과 발로 박자를 맞추며 제대로 웃고 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깨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다정한 손도 있을 것이다. 어둠 없이 잠드는 밤도 있을 것이다. 서러움 없이 말하는 입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중심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겁니다. 기어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대화는 쳇바퀴처럼 맴돈다. 꽃은 꿈으로 피었다. 진다. 꿈은 망각으로 소멸되며 완성된다. 깊어지다 어두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이제니 시인 / 발 없는 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나무로 만든 작은 관이라면 더 좋겠지. 나는 거기 누워 꿈 같은 잠을 잘 거야. 잠 같은 꿈을 꿀 거야.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내가 어디로 흘러와 있는지 볼 거야. 누구든 한번은 태어나고 한번은 죽지. 한번 태어났음에도 또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한번 죽었는데도 또다시 죽으려는 사람들. 제대로 태어나지도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 청춘은 다 고아지. 미로의 길을 헤매는 열망처럼 나아갔다 되돌아오지. 입말 속을 구르는 불안처럼 무한증식하지. 나의 검은 펜은 오늘도 꿈속의 단어들을 받아적지. 떠오를 수 있을 데까지 떠올랐던 높이를 기록하지. 나의 두 발은 어디로 사라졌나. 짐작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숨겨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 속에 묻어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는 짐작할 수 없는 높이를 수반하지. 높이는 종종 깊이라는 말로 오인되지. 다다르지 못한 온도를 노래할 수 있는가. 다다르지 못한 온도를 아낄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The JoongAng plus/시(詩)와 사색』2023
이제니 시인 /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산란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짐 그것은 사랑함이었다 먼지 구슬은 산에서 산으로 끝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기꺼이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우리가 깊이 사랑했던 것들 쁜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느 밤의 빛에 묻어 두고 온 것일까 노인의 얼굴로 다시 고쳐 묻기에 나는 너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입이 그려내는 그 문장 그대로를 받아 적으려고 어둠 속에서야 펼쳐지는 어린 얼굴을 마음속에 심어 두려고 다만 밤은 흐르고 흐르는 것으로서 흐르고 흘러서 쌓여 가고 쌓여 가다 흡어지는 것으로서 은자의 숲은 이미 오래전에 열려 있었다고 노인의 입은 말했다 나는 노인의 얼굴을 더듬듯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새들은 다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밤의 무리는 푸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구멍을 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잘 살아갈 수있다면잘 죽어 갈 수도 있다 춤을 추듯이 춤을 추듯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간신히 떠오르는 밤의 기억 속에서 볼 수 있다고 믿는 세계의 미망 속에서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무수한 방향에서 방향으로 여리고 둥근 마음을 굴려 보는 밤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붉은색으로 쓰면 가슴이 덜켜 내려앉곤 했다
이제니 시인 / 페루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제니 시인 /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지. 서로의 영혼을 더 잘 읽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더 좋은 빛을 나눠 주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갔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보았던 그 모든 풍경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지. 어디서 마주쳤는지 알 수 없는 얼굴들. 어디서 묻어 왔는지 알 수 없는 먼지들. 기억과 망각. 입김과 고드름. 반복해서 읽어도 새로운 책. 낱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낱말카드. 동사보다는 명사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계절. 겨울 숲속의 말 없는 산책. 고독 속의 고독. 고독 끝의 고독.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여행 가방을 꾸리는 새벽의 피로.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낯선 기차역. 말할 수 없는 말들과 말해져서는 안 되는 말들. 대기실. 휴게실. 정류장. 정거장. 싸구려 호텔 로비나 야간열차의 식당칸. 흡연 욕구로 가득한 공항의 흡연실. 불 꺼진 안내 데스크 위에 놓인 피로한 팔꿈치들. 나 혹은 당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시간. 읽거나 읽지 않았던 어제의 책들과 함께. 당신 혹은 내가 조금 부족하게 존재했던. 저곳과 그곳 사이의 그 모든 이곳들. 흘러가는 물결과 물결 속에서 조각 낱말로 간신히 말하던 날들.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몰라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었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간신히 남아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때. 전신주 아래에는 새들이 놓쳐버린 새 둥지 가지들이 떨어져 있었고.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은 기억은 죽지 않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새들은 오늘 다시 날아오르며 노래한다. 팔랑거리는 작고 거대한 날개들. 이 어둠이 걷히면. 이 기억이 스러지면. 어제의 양떼구름을 잊어버렸듯 오늘의 나무둥치의 상처도 잊게 되겠지. 기쁠 것도 슬플 것도. 기억할 것도 잊어야 할 것도. 간직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얻어야 할 것도 구해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먼지는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너에게는 아직도 잃어버려도 좋을 무언가가 남아 있었고.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에서 나무로 여전히 옮겨 다녔고. 어느 날 문득. 처음부터 흙이었다는 듯이. 마침내 땅으로 내려와 쉰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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