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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효 시인 / 성호와 합장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12.
윤효 시인 / 성호와 합장

윤효 시인 / 성호와 합장

 

 

주일마다 광역 버스 타고 나와

 

명동성당에서 급식 봉사 하는 시인에게

 

다른 일로 감사드릴 일 있어

 

형제님 고맙습니다

 

성호를 그었더니

 

내가 절집안 식구인 줄 진작 알고는

 

감사합니다

 

합장을 했다.

 

 -시집 『작은詩앗·채송화 제33호, 날이 참 좋지요』, 고요아침, 2025

 

 


 

 

윤효 시인 / 밥값

 

닭둘기라고 놀림을 받는 녀석들이

우리 학교에도 여러 마리 살고 있지요.

걔네들 하루 일과를 보면

그런 말 들어 싸지요.

매점 주변을 배회하다가

아이들이 흘린 빵 부스러기나 쪼아 먹는 게

하루 일이거든요.

닭둘기란 말, 싸지요, 싸.

그런데

딱 한 마리

밥값을 하는 녀석이 있어요.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한쪽 발목이 잘린 녀석인데요.

먹고사는 일에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어요.

절뚝거리면서도 연신 빵 부스러기를 찾아다니거든요.

그렇게 씩씩할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배우지 않겠어요?

목발도 없이 그러고 다니는 걸 보면서

시나브로 시나브로 배우지 않겠어요?

그 비둘기,

밥값 한번 제대로 하는 셈이지요.

 

 


 

 

윤효 시인 / 교육학원론

 

 

 어느 나라나 공항 근처 아이들은 하늘의 비행기를 그릴 때 바퀴까지 꼭꼭 그려 넣는다고 한다.

 

 


 

 

윤효 시인 / 창문 열고 바라보니

 

 

 구청 앞을 지나는 이들이 하나둘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하였다.

 

 구청에서 한 일이라곤 어느 저명한 금속공예가의 대형 조각 '향수鄕愁'를 치우고 그 자리에 감나무 몇 그루 심어 놓은 게 전부였다.

 

 


 

 

윤효 시인 / 시인

 

한낱 소음으로 치부되는

제 곡조가

매미는 서럽습니다.

밤이 깊어도

그 울음 그칠 줄 모릅니다.

저 울음 달랠 이

지상에는 없습니다.

 

 


 

 

윤효 시인 / 시를 위하여 · 4

 

시 공부 시작하던 스무 살 무렵

나중에 시론을 써서 낸다면

책 이름을 무엇이라 할까

생뚱맞게 이런 궁리를 하다가

정한 것이『언어경제학서설』

짧은말 속에 속울음을 담고 싶었다.


윤효 시인 / 시를 위하여 · 5

 

안양천 타고 내려와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23킬로미터

자전거 출퇴근치고는 무리인 듯싶어도

그 길에 원효대교 있어 가뿐하다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상판을 떠받치고 서 있는

그 다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내 다리도 군더더기 없이 가뿐, 가뿐해진다네.

불끈, 다릿심 솟는다네.


윤효 시인 / 시를 위하여 · 6

 

외로워서 시를 썼다고

시상식장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서러움 속에

부디 꼭꼭 갇혀 사시라

간절히

빌어 주었다.


윤효 시인 / 시를 위하여 · 7

 

낮에 쓴

시는

달빛에

헹구고

밤에 쓴

시는

햇빛에

말리고

 

 


 

 

윤효 시인 / 짐승

 

소나 돼지가 발정이 나도

축산농가에서는 황소나 수퇘지를 부르지 않는다

인공수정을 한다.

수컷한테서 채취한 정액을 암컷에게

주입한다.

짐승에게서

그 짓마저 빼앗은 것이다.

무서운 짐승이다.

 

 


 

 

윤효 시인 / 창문 열고 바라보니

 

 구청 앞을 지나는 이들이 하나둘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하였다.

 구청에서 한 일이라곤 어느 저명한 금속공예가의 대형 조각 '향수鄕愁'를 치우고 그 자리에 감나무 몇 그루 심어 놓은 게 전부였다.

 

 


 

윤효(尹曉) 시인

195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본명은 창식(昶植).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 편운문학상 우수상,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2014년 제1회 풀꽃문학상 수상. 현재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장, 문학의집서울 상임이사. 서울 오산중학교 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