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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온리 시인 / 가끔은, 별
메마른 풍경을 견뎌온 너를 바라본다 너는 거미줄 같은 균열을 남기며 너덜거리는 잎사귀 위에 촛농처럼 급히 굳어버린다 나는 천천히 하나, 들 세고 있었는데 눈 속에 잠기어 드는 건 멀어지는 등이었을까 등을 바라본다는 것은 등을 돌리는 것보다 더 아득한 일 네가 내밀었던 시린 눈빛은 여전히 내 기억의 옷깃을 움켜잡는데 어긋난 별로 반짝이는 너를 기다리는 밤 멀어서 아름다운 너와 나 사이에 마른 등 하나가덜컥, 내려앉는다
김온리 시인 / 루나틱
너는 단정하게 개와 늑대의 시간을 건너고
바닷물이 부풀어 오를 때 뒤집히는 달처럼 마주 선 눈동자를 빨아들이지
흔들리는 속눈썹에 떨어지는 빛의 깃털들,
만지면 사라지는 깃털을 타고 저기 빌딩 숲을 들여다봐 어제는 63층이었는데 오늘은 123층이야
달빛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턴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는 시간
저 흐느적거리는 무희들처럼 다시 입은 알몸으로 곤두박질치는거야 붉은 달의 긴 혀를 날름거리며 건배하는 거야
욕망의 그림자는 치욕임을 잊은 채
인형의 태엽이 모두 풀릴 때까지 킥킥대던 루나가 두 눈을 질끈 감을 때까지
김온리 시인 / 영웅시대 4
당신의 영웅은 이곳에 없습니다 이 도시를 떠나주세요, 손금의 지선 같은 도시의 한 골목에서 늙은 낙타의 밤을 생각하다가 폭우를 만났다
울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에 낙타는 별을 삼키고, 막 시동을 켠 자동차는 비상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렇게 빛나던 도시가 별안간 암전되다니 물의 날을 조심하라던 철학관 아저씨의 경고가 벌을 뱉지 못한 낙타의 속눈썹처럼 폭우 속을 어른거렸다
목소리만 높아진 도시의 하천 위로 줍지 못한 귀들이 떠내려갔다
영웅을 부르지 마세요 휘파람 소리마저 송두리째 우리 것이에요, 물 먹은 도시의 담장 안에서 강강술래처럼 견고한 여인들의 노랫소리만 드높았다
폐쇄된 도시를 도망쳐 나오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영웅을 만나면 전해주려던 시 한 편을 품에 안고, 늙은 낙타의 꿈을 생각하며 필사의 액셀을 밟았다
신기루 같았던 도시의 환영을 지우는 데는 채 한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시대는 영웅을 만들지만 영웅을 함몰시키는 시대도 있다
- 문예지<불교와문학> 2023년, 여름호
김온리 시인 / 유리창이 거울이 될 때
순식간에 없어지는 입김을 불다가, 문득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 날 카페 앞을 지나며 유리창에 머리를 빗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너머를 본다는 것은 손바닥의 한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흔적은 지문처럼 명료해서 얼룩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날아오는 돌의 방향을 가늠하다가, 문득 깨져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 날 카페 앞을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안이 보이는 사람은 눈물의 밖을 보는 사람, 모든 돌은 백만 개의 입을 가졌고 모든 유리창은 한 겹의 얼굴인데
당신이 깨진 유리창을 더듬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밤의 하이힐처럼 단호해졌다.
-시집 『나비야, 부르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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