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라라 시인 / 남은 이야기
그러니까 나는 우리 엄마의 깨물지 않고도 아픈 여섯 번째 손가락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얘가 인간이 되겠나……”
나는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일인데요 그 해 봄, 나는 밤마다 원인 모를 경기(驚氣)를 했고 내 위의 오빠들은 그 때마다 내가 편히 죽기를 바랬다는데요
나는 기억해보려고 한답니다 빈 젖을 물고 옹알이를 하던 나의 그때, 이것이 인간이 되겠나… 같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식구들의 그때, 그 때의 시간은 꼭 약 먹은 것처럼 흘렀다는데요 숟가락 위에서 하얗게 녹던 약, 세상을 한 가지 색으로 보이게 하던 약, 나는 정말 나쁜 우리 엄마의 여섯 번째 아픔이었답니다
모르겠습니다 가끔 어릴 적 그 약냄새가 코끝으로 확 퍼져오는데요 밤마다 헤맸던 곳, 눈이 없는 곳, 귀가 없는 곳, 그곳이 그 때마다 궁금해지곤 하는데요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는 왜 경기를 하지 않는지
나는 이제 잠꼬대를 하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꾼 꿈도 아침이면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 엄마에겐 여섯 번째 아픔입니다 그러니까……말입니다
—《포항문학》 2014년 통권41호
최라라 시인 / 사랑 그가 오른손 검지로 내 왼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손가락이 후벼 파는 내 혈관의 피 비린내를 음미했다 어쩌다 통증 같은 것이 올라오면 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 목도리 둘러주던 손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순간엔 눈꺼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눈에서 빠져나갔을 때 내 눈을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 나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였다 그가 손가락을 빼고 물 없는 수조에 나를 눕혀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숨쉬기를 기억해냈다 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 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보기로 했다
최라라 시인 / 물을 서술하다 1 물은 음흉하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로 다른 냄새에 기생하므로 제 체취를 남기지도 않는다 독특한 맛을 가졌으나 쓰다 달다 시다 짜다 떫다 이 맛을 제외한 어떤 맛이다 물은 저를 드러내지 않음으로 존재하는데 물이 필요해, 가 아니라 목이 말라, 라고 말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물이 깨끗하다는 정의는 오산이다 언젠가 그것의 속내를 본 적 있다 태풍이 왔고 기다렸다는 듯 편승한 물의 속내를 보았다 강둑과 콩밭과 개와 칠순의 노인을 순식간에 덮쳤다 그것이 물의 실체라 하지 않고 태풍의 위력이라 했으므로 아무도 물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은 여전히 투명하고 물은 여전히 깨끗하다 2 물은 음란하다 생물학적으로 물은 자웅동체다 어디서든 둥글게 몸 공그르는 행휘는 그들만의 독특한 체위다 물이 많이 모인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적 있는가 소리라고도 할 수 없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마음을 건드리고 두근거리리게까지 하는 경험을 한 적 있는가 바람 불거나 구름 가득한 다음 날이면 불어난 물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물의 종족 보존 방식은 다산과 단산을 반복하는 것 어느 날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보았다면 멀지 않아 흘러넘칠 물을 기대해도 되리라 인류보다 까마득한 시원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물은 변함없다 책상 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 물은 여전히 본능에 충실하다
최라라 시인 / 잔혹 내가 나를 숲속에 버리고 갔다 내 주머니에는 빵 조각도 조약돌로 없었으므로 나를 조금씩 뜯어 바닥에 뿌리기로 했다 손톱을 던져놓고 걷다 보면 손톱이 나왔다 발톱을 던져놓고 거다 오면 발톱이 나왔다 매번 다른 길로 들어섰으나 걷다 보면 같은 길이었다 그 숲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내 몸은 하나도 남지 않 았다 마침내 눈알 하나만 남았을 때 보았다 반 조각만 남은 심장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눈이 없었으므로 나는 나를 볼 수 없었따
최라라 시인 / 물병 옆 자두 한 알 저기, 어제 먹은 자두가 오늘 마신 물병 옆에서 자꾸만 익어가는 것 좀 봐 햇빛이 없어도 스스로 달아올라 광합성을 하잖아 네가 먹고 그가 먹고 그녀들이 먹어도 이빨 자국 하나 없는 내일을 닮았잖아 자두가 탱탱해질 때마다 물병이 움찔대고 있어 물은 물에게 흐르고 자두는 자두에게 흐르지만 어느새 물이 자두를 닮아가고 있잖아 물속에 저렇게 새콤한 혈관이 있었다니, 물병 옆에 있는 나 좀 봐 아무리 깨물어도 흠집나지 않는 저 자두 좀 봐
최라라 시인 / 편난운
빨래는 은유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아이가 이불보 뒤에서 하얗게 웃었습니다. 어떤 때는 엄마가 부르고 어떤 때는 엄마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헝겊조각으로 된 두 팔이 허공에 물리고 분가루를 뒤집어쓴 채 잠든 나방이 둥글게 고요를 감아올렸습니다.
전설에 물든 봉숭아 꽃잎이 이불깃을 헤치면 이내 붉어진 노을이 이부자리 밑에 누웠습니다. 함부로 지는 일이 일과인 꽃들이 소나기에 젖은 괘종시계 속, 물 젖은 숫자들을 헤아립니다. 낮달이 내려오는 정원엔 안으로 자라는 나무의 요일이 있습니다.
북벽에서 뼈들이 달그락 달그락 요의를 느낄 때, 아이는 아홉 번의 여름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소녀의 아홉 살은 죽은 나이인가요, 살았던 나이인가요? 늦은 오후, 제 그림자를 먹어치우며 거미가 가고 있습니다.
빨래는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람이 수고로운 풍경을 걷어가고 있습니다. 골목마다 분화구들이 생겨나고 하얀 소매를 당기며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슬픔이 많은 양서류들이 뭍을 떠나고 있습니다.
최라라 시인 / 봄을 기록하는 몇 가지 방법
하나 아카시아 꽃술을 담는다 꽃잎 모양의 혈관이 하나로 뭉쳐 둥둥 떠오른다 가벼운 것들은 더욱더 가벼워지기까지 저를 몇 번이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야하는 걸까
둘 조금만 천천히 걷고 싶어 봄은 슬픔까지도 물 흐르게 할 수 있지 따뜻하게 할 수 있지 아주 천천히 흘러 나는 따뜻해지고 싶어
몇 정거장을 걸어 너의 집 앞으로 간다 그 곳에서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무작정 기다려도 햇살은 따뜻하지
셋 검은 셀로판지 안경을 쓰고 햇빛 속에 선다 봄은 출구가 없는 방 나는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마음은 투명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끝내 나오지 않는 문
덧붙임 봄은 슬픔이라는 무중력의 덩어리. 쪼개면 비리지 않은 선혈과 끝내 깨지지 않는 알갱이. 종이컵에 받은 선혈을 숨도 쉬지 않고 마실 것. 마지막으로 알갱이를 천천히 빨아 먹을 것. 어쩌다 목에 덜컥 걸리면 조금 소리 내어 울면 그만.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현경 시인 / 연연한 그리움 외 6편 (0) | 2025.12.13 |
|---|---|
| 김규성 시인 / 오래된 악수 외 6편 (0) | 2025.12.13 |
| 류경무 시인 / 백 마리의 닭 외 6편 (0) | 2025.12.12 |
| 김온리 시인 / 가끔은, 별 외 3편 (0) | 2025.12.12 |
| 이강산 시인 / 시간을 굽다 외 6편 (0) |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