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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무 시인 / 백 마리의 닭
개나리 짖어대고 있습니다 버스 옆으로 닭장 차가 가만히 와서 멈췄습니다 삐약삐약 닭장 차가 웁니다 닭들이 우는 일은 이즈음 봄꽃들이 제 모가지를 꺾는 일과 같습니다 누군가 바꿔치기한 저 탈것의 야바위야 어찌되었든 방금 백 마리의 닭이 내 옆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이 봄은 아무도 몰라보는 봄입니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 곰삭은 내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디서 또 누가 갇혀 있는지 백 마리의 닭들이 짖어댑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며 제 이름을 쪼아먹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류경무 시인 / 어제
캄캄한 방에 앉아 있었다 그 방엔 나밖에 없었다 구석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를 모른 척했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이만하면 됐잖냐고 그만하라고 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울만큼 다 울었다 울고 싶은 건 하나도 없다고 굳이 꼽으라면 당신밖에는 당신밖에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흠뻑 젖은 그가 말했다 그만하자고 나를 그만 용서하라고
류경무 시인 / 그때 아주 잠시
화장실에 갇혔던 술 취한 레지스탕스는 모든 걸 포기했다 점점 뚱뚱해져서 이제 저항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곧 고백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게 죄였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만 묻자 이후의 생은 모두 참혹해야만 하는가? 하찮고 우연한 것들이 불결한 모습을 가졌듯 요새는 살마남은 깡통 부스러기들이 딸랑거리며, 전범자의 얼굴을 하고 수시로 되묻는다
여기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도대체 어떻게 나갈 수 있느냐고 그러면 당신은 씨익 웃으며 침묵의 거대한 미소를 던지겠지 그렇다고 하늘을 올려다볼 것까지는 없는 일 그건 순전히 이곳의 문제였으므로
그때 나는 아주 잠시 늙은 몸을 한 어떤 짐승이 멀리서 이쪽을 향해 홀로 반짝이는 것을 본다
밤의 등대가 캄캄한 바다에 자기의 얼굴을 묻듯 이제는 정말 내게 마지막인 당신 처음 왔을 때처럼 웃으며
류경무 시인 / 편통
왼쪽 다리를 바닥에 쓱쓱 갈면서 걸어오던 풍 맞은 김씨 왼쪽으로 말라붙은 이파리 달고 악착같이 겨울을 견디던 나무 그리고 평생 왼편이었던 어머니 생각하면, 갑자기 왼손이 먹먹해져서 왼손으로 밥 먹거나 악수를 청할 때 자꾸 숟가락을 놓치거나 사람들의 손등이 먼저 만져진다 내가 편애했던 것들은 모두 왼편에 서 있었다 나와 친해지려 했던 것들은 모두 왼쪽을 앓고 있었다 이제 이곳의 바람에게 뺨 내어줄 때 아무 뺨이나 갖다대기로 한다 누굴 편애할 마음도 없이 양쪽이 다 아프거나 씻은 듯 낫거나
류경무 시인 / 내 입 속에 그득히 담긴
죽은쥐나무 죽은쥐나무에 다다른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거기엔 홍조류가 그득했으므로 굶을 까닭이 없었다, 아프리카 잉어는 한 때 이 강가까지 도착했다 가끔 낮은 피아노 소리 들린다 거기 아름다운 붉은 꽃 아래, 새카만 아이들이 시소를 탄다 나는 호수에서 막 걸어 나오는 중이다,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악어들이 몰려온다
벨라루스의 새끼곰
푸른 그림자 저 푸르러 가는 외국의 말, 그래서 지금 남은 건 저기 바다 뿐이다, 사실 구체성을 잃어버린 바다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맛있는 사과가 잘 보인다 도대체 어떤 짐승이 이 동굴을 버렸나 나는 거침없는 새끼곰들과 함께 벨라루스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침 젖을 굶었다 형제여 이 꽃을 먹어라 그리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자 날지 못하는 큰새가 처음 보는 넓다란 풀밭을 가로 지른다 신선한 고기 한 조각이 그립다
동굴에서
그네들은 무척 위험한 종이다 그들은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가루를 지녔다, 하지만 자꾸 들어오겠다는 걸 어쩌겠니 밖은 눈보라,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된 저녁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 한번 들어온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저 종잡을 수 없는 성채 또한
날이 새면 모든 게 끝나 있겠지, 그리고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릴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은 항상 너무 심각하게 잠을 청하는 게 버릇인 게로군 사실 이번 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내 입 속 그득히 담긴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점점 추워지던 마지막 별이었다
류경무 시인 / 후일담
늙기 전에 서둘러 자살해 버린 남자의 방.
보도블록을 덮친 차에 두 다리를 잃어버린 거미 여인의 술집.
제 빨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자신을 먹어 치워서라도 뭔가 계속 해 보겠다는 문어의 수족관.
출생이 곧 비극이었던 어떤 원숭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 녀석은 사냥꾼의 총을 피해 사파리를 넘다가 강철 철조망에 휘감겨 버렸다.
누구에게나 재미난 이야기는 있다. 요약하자면,
매일 슬픈 노래를 부르지만 전혀 슬프지 않은 가수의 마음이랄까.
여기서 아프리카는 한참 멀다. 공원에는 별의별 동물들이 날뛰는데,
살려고 발버둥 쳐도 늘 해변에 목덜미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아무렴, 코앞의 남쪽 바다도 거의 다 저물고 있다.
-계간 『시하늘』 (2024년 봄호)
류경무 시인 / 칠흑이라 부르니 칠흑은 어두운 흙
칠흑이라 부르니 칠흑은 어두운 흙.
살아서 흙을 밟았고 밤에는 별을 올려다보았지.
별이 여기로 온 적도 있어.
태양은 빛의 무덤,
빛은 죽어 빛나서, 빛이라 부르지.
빛을 통째 삼키거나 잘게 끓여 먹는
우리는 시간 노동자.
나머지 빛줄기는 핀셋으로 주워 담지.
처음 빛이 온 곳으로 빛의 숨통을 돌려세우는,
밤에 살아 빛나고 낮에 죽어 빛나는
칠흑의 짐승이 빛의, 망막 속에서 휘어지네.
하여, 빛이여 안녕
더러 우리는, 여전히 반짝이는 칠흑의 묘지에서 만나겠지.
-《시와반시》 2023년 가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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